출장지인 샌프란시스코에서, 반가운 메일 한 통을 받았습니다. 재미교포 2세 정이삭(29·사진) 감독의 영화 ‘문유랑가보’가 지난 11일 미국 LA에서 열린 2007 AFI(American Film Institute:미국 영화연구소) 영화제에서 장편부문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영화라는 예술의 보존과 발전을 취지로 올해 창립 40주년을 맞은 AFI는 일반 관객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미국의 국립 기관. 하지만 영화인들의 세계에서 AFI는 오스카 트로피보다 더 강력하고 권위 있는 이름입니다. 메일을 보낸 분은 정 감독의 아버지 정한길씨. 아들의 성취에 대견해하는 그의 편지에서, 6개월 전 칸에서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정 감독과 그의 아버지를 만난 곳은 60회 영화제를 맞아 도시 전체가 들썩거리던 5월의 칸. 그는 자신의 첫 장편영화 ‘문유랑가보’로 칸 영화제에 깜짝 초청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헐렁한 티셔츠 차림의 그는 감독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앳된 대학생 같은 분위기였어요. 그리고 그런 소박한 외모보다 영화를 대하는 그의 시선에 더 깊은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촉망 받는 예일대 의대생이 돌연 영화로 인생을 바꿨다거나, 아프리카에서 혼자 촬영·편집·연출을 도맡으며 자비 3000만원으로 만든 독립 영화가 전세계 영화인의 꿈인 칸에 ‘입성’했다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조차도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더군요. 세속적 명성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던 그의 사려 깊은 생각에 비하면 말이죠.

짧은 지면의 한계 때문에 당시 인터뷰에는 모두 담아내지 못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는 영화로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는 신념의 소유자였습니다. 돈과 재미를 추구하는 할리우드의 신도가 아니라, 영화를 통해 영혼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고 믿는 의대 출신 몽상가였죠. ‘문유랑가보’는 최고의 전사(戰士)를 뜻하는 르완다어.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꿈꾸는 르완다 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이 영화에서, 르완다 내전(1994년)의 상처는 고스란히 환부를 드러냈고 다시 조금씩 아물고 있었습니다. 서구의 눈으로 바라본 연민의 아프리카가 아니라, 과장이나 동정 없이 모습을 드러낸 자기들의 르완다. 실제로 주인공 배우들도 내전에서 부모를 잃은 르완다 소년들이었죠. 영화가 칸에서 공식 상영되는 날,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의 영화도시를 찾았던 르완다 소년 배우들의 해맑은 눈동자를 기억합니다. 정 감독이 사비를 들여 비행기 값을 마련했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들었었죠. 비록 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들에게는 열렬한 기립박수가 쏟아졌습니다.

열흘이나 지나 정 감독의 수상 소식을 알리려니, 기자 체면이 말이 아니군요.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 소식을 가장 먼저 알리게 됐다는 변명으로 위안을 삼으려고 합니다. 정 감독의 AFI 수상을 뒤늦게나마 축하합니다. 그의 영화가 한국영화인지, 미국영화인지, 아니면 아프리카 영화인지는 제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AFI에서 상 하나를 받았다고 그의 영화가 갑자기 달라지는 것도 아니겠구요. 단지 영화로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는 그의 신념 혹은 몽상이, 주류 영화인들로부터도 추인 받았다는 대목이 반가울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