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석 사회부 차장대우

프랑스 혁명 당시 ‘좌파’ 자코뱅 당을 이끈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는 ‘빈자(貧者)들의 변호사’라 불렸다. 자신을 ‘농민의 친구’로 봐주기를 원하던 그가 편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정책의 압권은 반값 우유사건이라는 유명한 일화다.

사건의 시작은 프랑스 혁명기에 생필품 값이 올라 시민들의 원성이 높아지면서였다. 로베스피에르는 당장 “프랑스 어린이는 우유를 지금의 반값에 먹을 권리가 있다”고 선언하고 우유값을 강제로 내리게 했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단두대로 보내겠다는 엄포도 놓았다. 처음에 우유값이 반으로 떨어져 시민들이 행복해진 것도 잠시.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농민들이 젖소 사육을 포기하자, 우유 공급량이 줄어 우유값이 뛰기 시작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우유값이 비싸진 이유가 비싼 건초값 탓이라는 말을 듣고 이번에는 건초값을 내리라고 명령했다. 불똥을 맞은 건초재배 농민들은 건초생산을 중단하거나 땅을 다른 용도로 바꿔버렸다. 그 때문에 우유에 이어 건초까지 값이 뛰는 일이 벌어졌다. 대중은 폭발했고, 로베스피에르가 갈 곳은 단두대뿐이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검소하게 살며 혁명에 헌신한 로베스피에르는 “돕자고 한 건데…”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수험생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수능등급제도 그런 점에서 마찬가지다. 2003년 수능등급제를 주도한 대통령자문 교육혁신위원회 자체가 대학 서열구조를 깨려는 좌파적 평등이념을 배경에 깔고 있었다.

이들의 ‘선의(善意)’는 소숫점 이하의 점수 차이로 수험생 간 서열이 매겨지고 당락이 갈리는 현실을 타개하면 입시경쟁도 완화될 것이라는 구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과도한 경쟁이 사교육비 지출 증가와 ‘행복은 성적순’이라는 그릇된 이데올로기로 이어지는 만큼 이 악순환의 고리를 깨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이들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등급으로 두루뭉술 묶어 놓으면 95점 받은 학생이나 98점 받은 학생이나 같은 등급에 속할 것이고, 그러면 수능이 덜 중요시되는 만큼 사교육비도 덜 들어갈 것이라는 단순한 계산이 나온다. 이른바 ‘수능 무력화’ 논리다. 1등이 아니라도 적당히 우수 그룹에만 끼면 비인간적인 경쟁이 완화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그로부터 4년이 흐른 뒤 이 제도가 처음 적용된 2008학년도 수능시험을 통해 그들의 논리는 ‘희망사항’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단 1점의 차이로 수능등급이 바뀌면 그 1점이 정시모집에서는 등급 간 배점차이로 인해 5~8점의 격차를 낳는다는 것을 알게 된 학생들이 더 사교육에 매달리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실제로 사교육시장은 이 정부 출범 초기인 4년 전에 비해 33%나 늘어났다. 또 등급이 같은 학생들은 마지막 남은 관문인 논술시험에서 0.1점이라도 이기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 이로 인한 학생들의 불안감은 고2, 고1로까지 확산돼 학교현장은 지금 전인(全人) 교육과 인간다운 교육을 외치던 수능등급제 입안자들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이 정부 초기의 교육정책 입안자들과 로베스피에르가 닮은 점은 바로 ‘현장’을 몰랐다는 점이다. 의도가 좋으면 결과도 좋으리라고 막연히 믿는 아마추어들의 한계다. 영국 속담에도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는 말이 있다. 현실을 모르고 편 정책으로 인한 결과는 이처럼 치명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