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역사가 타키투스는 “로마인은 폐허를 만들고 그것을 평화라고 불렀다”고 지적했다. ‘팍스 로마나’라고 불리던 시기, 로마 시민들에 빵과 서커스가 무료로 베풀어지는 동안 밀 생산지였던 이집트에서는 노예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로마의 번영이 절정을 이루던 오현제(AD 96~180년)의 마지막을 배경으로 한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통해 팍스 로마나와 팍스 아메리카나의 음영을 조망해보자.
영화의 배경은 AD 180년 로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재임기로 로마의 총사령관 막시무스 장군(헐리우드가 꾸며낸 가상 인물: 러셀 크로우 분)은 게르만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아우렐리우스는 승리를 치하하며 오현제의 전통에 따라 막시무스를 황제로 추대하려 하지만 막시무스는 이를 거절한다. 한편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코모두스는 권력을 자신에게 세습하지 않겠다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막시무스까지 살해할 것을 명한다. 막시무스는 처형장에서 가까스로 탈출해 고향집으로 달려가지만 그의 가족은 이미 로마군에 의해 화형 당한 뒤였다.
막시무스는 글래디에이터(검투사)가 돼 코모두스가 개최한 검투 시합에 참가한다. 사람들은 매 경기마다 극적인 승리를 거두는 새로운 검투 영웅, 막시무스에게 열광하고 코모두스의 질투와 분노는 더욱 불타오른다. 수 차례 그를 없애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코모두스는 막시무스에게 결투를 제의한다. 그리고 막시무스를 확실히 없애고자 허리에 치명상을 입혀 출전시킨다.
출혈로 정신이 혼미해진 막시무스는 비틀거리며 혈전을 벌인다. 코모두스는 숨겨 놓은 칼로 막시무스를 공격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결국 자신의 칼에 찔려 숨진다. 허리의 상처로 인해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막시무스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아우렐리우스의 마지막 소원이었던 공화정의 이상을 이루어달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는다. 콜로세움 전경을 비추던 카메라는 서서히 원형 경기장의 하늘 위 구름 속에 가려진 햇빛을 비추며 정지한다. 마치 그 빛이 ‘희망의 빛’이라는 것을 암시하듯. 비록 로마만을 위한 희망, 로마인만의 희망 사항이라 할지라도….
밀레니엄의 첫 해인 2000년 헐리우드는 왜 고대 로마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오현제 시대’의 마지막 황제 아우렐리우스와 폭군인 아들 코모두스 시대를 배경으로 영화를 제작했을까?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의 지적대로 제국의 ‘격차’를 인식하고 그 차이를 줄여보려는 의도였을까? 아니면 고대 로마의 찬란한 모습이 바로 미국의 지향점으로, ‘현대판 로마’가 곧 오늘날의 미국이라는 발상에서 나온 것일까?
현재 미국은 고대 로마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이민족을 흡수하여 사회를 이루고 있는 용광로 같은 곳일 뿐 아니라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찰국가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며 단일 제국으로서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다. 로마 황제 중 가장 현명한 황제로 알려져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오현제의 전통을 깨고 친아들 코모두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역사의 아이러니에 대해 ‘어쩌면 이런 숨은 이면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라는 투로 가정을 세우고 플롯을 짜낸 것은 자신들의 희망사항, 이상화 과정을 영화를 통해 재현한 것 아니겠는가? 1800년이라는 시대의 간극을 넘어 고대 로마를 재현한 ‘글래디에이터’는 ‘영화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 과 ‘역사는 현실의 이상화 과정’이라는 영화와 역사에 대한 오래된 정의들을 설득력 있게 나타낸 영화다.
팍스 아메리카나와 팍스 로마나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평화, 미국의 지배에 의해 세계의 평화질서가 유지되는 상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용어다. 팍스(Pax)는 원래 라틴어로 ‘평화’를 뜻하는데, 과거 로마 제국이 피정복 민족들을 통치하던 것을 가리켜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 일컫고, 19세기 영국의 식민 통치를 ‘팍스 브리태니카(Pax Britanica)’라 부른 것에서 유래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막대한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재편하는 등 실질적 주도권을 행사했다. 미국은 안으로는 민주주의와 평화를 추구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반민주적이고 패권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대표적 나라 중 하나다. 공존과 평화를 지향해야 할 21세기에도 ‘강한 미국’ ‘악의 축’ 발언을 일삼으며 자국의 번영을 위해 남의 자유와 평화를 짓밟는 패권주의…. 이것이 ‘미국의,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평화인 ‘팍스 아메리카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더 생각해볼 거리
① 검투사의 뾰족한 검, 말과 채찍질, 참혹히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짜릿해하던 관중들을 보고 있노라면, 고대 로마의 원형 경기장은 ‘콜로세움 잔혹사’를 찍는 대형 스크린 세트처럼 보여 진다. 검투사는 당대 최고의 엔터테이너, 원형 경기장은 섹스·스포츠·스크린의 3S 전당으로 비쳐진다. 콜로세움의 스포츠를 현대의 3S 정책, 우민화(愚民化) 정책과 비교해 설명해보자.
②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등과 같은 로마와 관련된 속담들을 찾아보고 이런 말들이 로마의 패권주의, 팍스 로마나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③ 헐리우드 CG 기술로 콜로세움을 합성, 로마를 재현해냈다는 ‘글래디에이터’는 팍스 로마나를 되새기며 팍스 아메리카나를 에둘러 말하는 영화다. 이외에 미국의 패권주의를 부르짖는 영화들을 찾아보고, 왜 이런 문화적 현상이 대두되는지 그 이유를 따져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