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당쟁사 ‘당의통략(黨議通略)’의 저자 이건창(李建昌)은 열네 살 때인 고종 3년(1866) 과거에 급제해 최연소 급제 기록을 세운다. 이는 특별한 경우이고 책벌레 김득신(金得臣)은 현종 3년(1662) 59세로 겨우 급제했고, 그 외에 평생 과거에 매달리다 인생을 마치는 과거 낭인들이 적지 않았다. 이런 노년 자원을 국사에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로과(耆老科)를 신설한 임금이 영조였다. 재위 32년(1756) 예순셋이었던 영조는 대왕대비 인원왕후 김씨의 칠순 생신날 환갑 넘은 신하와 종친들을 거느리고 진하한 후 역시 환갑이 넘은 선비들만 대상으로 과거를 실시했다. 보통 장원급제의 경우 6품이 주어졌으나 이 기로과의 장원 이가우(李嘉遇)에게는 특별히 정3품 첨중추(僉中樞)를 주었다.

나이 많은 비서들과 지내고 싶었던 영조는 일흔 살 때인 재위 39년(1763) 기로과 출신 고몽성(高夢聖)을 특별 승진시켜 승지로 삼았다. 실록의 사관(史官)은 고몽성에 대해 “늙고 잔약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어 사람들이 많이 비웃었다”라고 젊은 엘리트의 시각에서 비판하고 있다. 영조는 나아가 일흔아홉 살 때인 재위 48년(1772)에는 정원 6명인 승정원에 기로과 출신만 4명을 배치하고, ‘머리 흰 네 사람의 집’이란 뜻의 ‘사호각(四皓閣)’이란 어필 현판까지 내렸다. 이듬해 기로과 출신 민수집(閔洙集)이 영조의 몸을 보색(保嗇·몸을 보호하고 아낌)하라고 상소한 것에 대해 사관은 “이 소를 올린 것은 오직 공을 바라는 마음이었다”라고 비판했지만 영조의 장수를 바라는 진심이 담겼을 것으로 본다. 영조 48년(1772) 기로과의 문과 급제자가 6명인 데 비해 무과는 무려 626명이 뽑혀 건장한 노익장을 과시했다.

지금 우리 사회의 평균수명은 대폭 늘어났지만 정년은 오히려 짧아지는 모순에 직면해 앞으로 노인 문제가 큰 사회문제가 될 것이라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영조의 시각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기로과의 최고령 급제자는 고종 27년(1890)의 정순교(丁洵敎)로 1805년생이니 여든여섯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