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에 대한 ‘종전 선언’ 내지 ‘종전을 위한 선언’이 쟁점이 되고 있다. 전쟁의 일각을 형성했던 미국은 이 전쟁을 어떻게 기억할까? 미국이 치른 두 번째 한국전쟁(첫 번째는 신미양요)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핼버스탬(Halberstam)의 유작이다. 1964년 베트남 전쟁 보도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핼버스탬은 탈고 후 5일 만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이 책은 발간 직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고, 이라크 전쟁의 피로감에 젖어있는 미국민들의 시선을 끌어 모았다.

얼마전 부시 대통령은 6·25전쟁, 베트남 전쟁, 이라크 전쟁을 하나로 꿰어서 자신의 전쟁관을 정당화하려다가 빈축을 샀다. 그렇지만 베트남 전쟁과 6·25전쟁 사이에 뭔가 연결고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핼버스탬은 1962년 뉴욕타임스 사이공 특파원으로 일할 당시 만났던 한 미군 병사로부터 그가 겪은 한국 전쟁에 관해서 들었다. 베트남은 더웠고, 한국은 추웠다. 베트남 전쟁과 6·25전쟁의 연속성에 착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문제의식은 1986년 런던에서 출간된 캘럼 맥도날드의 ‘코리아: 베트남 전쟁 이전의 전쟁’과도 유사하다.

베트남 전쟁에 비해 6·25전쟁은 훨씬 더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었다. 베트남 전쟁의 유혈은 컬러TV방송을 통해 중계되면서 미국민의 뇌리에 각인되었지만, 6·25전쟁 당시까지 컬러TV방송은 없었다. 6·25전쟁은 베트남 전쟁처럼 징병거부 운동을 벌이던 젊은이들로 인해 사회적 이목을 끌 수도 없었다. 미국인들에게 6·25전쟁은 그저 2차 세계대전의 말미처럼 취급됐다.

살얼음처럼 보이도록 처리된 이 책의 장정은 1950년 겨울 한국에서 미군을 엄습했던 겨울을 상징한다. 아메리카 원주민, 영국, 에스파냐, 중국의 의화단과 공산군, 그리고 일본군과 싸우는 동안 미군이 그토록 길고 처참한 후퇴를 경험한 적은 없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문명권과의 충돌이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리던 미군들에게 그 해 한반도의 겨울과 지형은 알래스카를 연상시켰다. 저자는 김일성의 전쟁노선에 맞선 미군의 개입이 왜 이토록 무모한 북진으로까지 이어졌는가에 주목한다.

저자는 워싱턴과 도쿄에 앉아있던 엘리트들과 “가장 추웠던 겨울”을 직접 체험했던 평범한 소총수들을 대비시킨다. 맥아더 장군은 웨이크 섬에서 마치 정상회담이라도 하듯이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중국은 참전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참전한다면 세계역사상 최대의 살육전이 벌어질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맥아더는 영국과 중앙정보부(CIA)를 의심했다. 실제로 영국과 CIA를 연결했던 킴 필비는 소련 스파이였다. CIA대신 한반도의 첩보작전을 독점했던 맥아더 장군의 참모 윌러비 소장은 중국군의 동향에 대해 오리무중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준비된 장군이었던 맥아더를 통제하기에는 트루먼은 준비되지 않은 우연의 대통령이었다.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영국 성공회 신부의 아들로 태어나 영국적 주류가 되고 싶어했고 한국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공화당 지도자 로버트 태프트는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체결했던 윌리엄 태프트의 아들이기도 했는데, 그는 한국 전쟁이 차기 대통령 선거에 미칠 영향을 계산하고 있었다.

핼버스탬은 망원경적 시각과 현미경적 시각을 접합시킨다. 망원경적 시각을 통해 아시아와 미주, 그리고 유럽까지 아우르는 조감도를 그려내는가 하면, 심층 인터뷰를 통해 인간의 내면을 클로즈업시킨다. 망원경적 시각을 통해 유럽 편향적이었던 워싱턴의 정책, 1949년 중국 공산화 이후 민주당과 공화당 간의 세력관계 변화, 1949년 매카시의 의회진출, 그리고 소련 핵실험 등 미국의 파병 결정을 몰아갔던 여러 겹의 구조를 파헤친다. 그런가 하면 100여 명과의 광범위한 인터뷰들을 통해 모래시계 안의 모래알들처럼 발버둥쳤던 인간들을 줌렌즈처럼 끌어당긴다. 이런 접근은 6·25전쟁에 관한 구술사적 접근이 각광을 받고 있는 학계의 흐름과도 궤를 같이 한다.

이 책은 2006년 겨울의 한 인터뷰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핼버스탬은 1951년 2월 지평리(양평군) 전투에서 소대를 지휘했던 폴 맥기 중위와의 인터뷰를 위해 노스 캐롤라이나주(州) 샬럿시(市)에 간다. 지평리 전투는 프리먼 대령이 이끌던 23보병연대가 유령 군대라고 불렸던 린뱌오(林彪)의 2만 대군을 막아낸 전투였다. 당시 미군에는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으로 중장 계급을 버리고 중령으로 참전했던 몽클라르의 대대 병력도 합류했다. 지평리 전투는 밤에만 이동하던 중공군을 끌어내기 위해 리지웨이 사령관이 세웠던 유인책의 일환이었다.

1951년 한국의 지평리에서 죽음을 모면했지만, 2006년 노스 캐롤라이나에 앉아 다가오는 생의 종착점을 기다리고 있던 노병의 구술은 담담했다. “나는 옳은 일을 했다. 그것은 해야만 하는 일이었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내게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았다.” 그는 2차 대전 당시 해병대에 자원했지만 색맹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대신 육군으로 유럽 전선에 참전한 후 퇴역했다. 형 존 맥기와 함께 식료품점을 운영했지만 주민들이 도시로 이주하면서 매상은 격감했다. 돈도 벌면서 세계여행도 할 수 있다는 모병관의 제안에 따라 재입대를 결심한 맥기 형제는 이미 경험한 유럽 대신 아시아를 택했다. 서울의 워커힐로 기억되고 있는 워커 장군과의 조우는 폴 맥기에게 장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줬다. 시골의 고교 중퇴생이었던 그에게 대학 졸업생들을 제치고 장교가 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가 이끌던 소대는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과 육박전까지 벌였고, 맥기 소대장은 46명의 소대원들 가운데 살아남은 4명중 1명이 되었다.

맥기 중위와의 인터뷰 약속에도 불구하고, 폭설이 내리자 핼버스탬은 인터뷰를 취소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직업적 존재 이유를 상기하며 은퇴한 노병과의 약속을 지켰다. 맥기 중위와 달리 핼버스탬은 하버드 출신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언론인이었다. 두 사람의 인생은 달랐지만, 각자의 인생에 주어진 몫을 다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같았다. 저자는 미국 사회의 엘리트였지만, 워싱턴이나 도쿄에 앉아 전쟁을 명했던 엘리트들이 아니라 묵묵히 약속을 지켰던 민초의 개인적 삶을 들여다 보는 방식을 통해 전쟁의 의미를 재해석한 유작을 이라크 전쟁에 지친 미국민들에게 남겨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