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어느 날, 전광진(全廣鎭) 성균관대 중문과 교수가 퇴근하고 막 집에 들어서려는데,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딸애가 다짜고짜 물었다. “아빠, ‘등호’가 뭐야?” “응~ 그건 ‘서로 같음을 나타내는 부호’를 말하는 거야.” “그런데 그걸 왜 ‘등호’라고 해?” 순간, 전 교수는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같을 등(等)’ ‘부호 호(號)’라는 것만 알면 되는데, ‘등호’라는 글자만으론 아무것도 알 수 없지 않은가?

그로부터 12년 동안, 전 교수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사전’ 편찬에 매달린 끝에 2000여 쪽에 달하는 ‘우리말 한자어 속뜻사전’(LBH교육출판사 刊)을 출간했다. “국어사전에서 ‘타원(楕圓)’이란 말을 찾아보면 어려운 수학적 정의만 싣고 있어요. 하지만 ‘길쭉한[楕] 동그라미[圓]’라는 어휘 자체의 뜻은 학생은 물론이고 교사들도 잘 모르고 있지요.”

그렇다면 한자라는 문자는 그 자체에서 이미 뜻을 암시하는 ‘힌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여기에서 전 교수가 착안, 개발한 것이 ‘LBH(Learning by Hint) 학습법’이다. “학생들이 교과서의 어려운 단어들을 무작정 외울 게 아니라, 낱낱의 글자가 무슨 뜻이며 그것이 단어의 뜻에 어떤 힌트 역할을 하는지 알게 되면 속이 시원해지고 재미가 있을 뿐 아니라 쉽게 기억할 수 있게 되지요.” 그것은 ‘이해력’ ‘사고력’ ‘창의력’의 ‘3력(力) 효과’로 이어진다고 그는 말했다.

▲ ‘우리말 한자어 속뜻사전’을 낸 전광진 교수는“교과서에 한글로만 적힌 한자어를 보고‘그 뜻을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 학력 저하의 원천적인 문제”라고 말했다.

‘우리말 한자어 속뜻 사전’의 표제어는 여느 국어 사전과 다를 바 없지만, 한자의 속뜻 풀이를 내세운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가두’(街頭)를 찾으면 ‘(거리 가, 머리 두) ①거리(街)의 첫 머리(頭) ②길거리’라고 풀이한다. 대통령(大統領)은 ‘대통(大統)을 이어 다스림(領)’이란 속뜻을 달았다.

국어 어휘의 70%, 학술 용어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한자어인데도 ‘재미(在美) 한국인 과학자’의 ‘재미’가 무슨 뜻인지 아는 고등학생이 겨우 5%인 현실에서 이런 학습법은 우리 교육의 맹점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전 교수는 1999년부터 지금까지 조선일보에 2500회 넘게 연재하고 있는 ‘생활한자’에 이 학습법을 도입, 독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다.

하지만 누구도 이런 작업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전 편찬 작업은 지난(至難)했다. 5만7520개의 어휘를 낱글자 하나하나의 뜻대로 풀이하기 위해 원고지 2만6500여 장 분량의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써 내려가야 했다. 제작비를 우려한 출판사 6곳으로부터 퇴짜를 맞은 끝에 사재를 털고 부인 이숙자씨에게 발행인을 맡겨 출판사를 새로 만들어야 했다.

정두희 삼성경제연구소 지식경영실 컨설턴트는 “학생들이 뜻도 모른 채 개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우리 교육 현실에서, ‘암기식 학습’을 탈피하고 정확하고 근본적인 ‘이해식 학습’으로 바꾸게 할 수 있는 사전”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