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내 이야기부터 먼저 합시다"라고 그는 질문을 막았다.

"고급 한정식이라면 옆에 앉는 여자가 예쁘면 됐지, 음식 내용이나 그릇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음식 문화라는 게 없어요. 음식 장사도 상놈이 하는 거지 양반이 하는 장사가 아니란 거요. 돈 있는 사람은 결코 음식 문화라는 거 안 합니다. 그런데 나는 19년이란 세월 동안 모든 재산을 털어 넣고 '식(食)문화'를 떠들어왔습니다."

통 큰 상체에서 나오는 우렁찬 목청이 10분간 이어졌다. 내가 실례를 무릅쓰고 다시 끼어들자, 그는 이 자리가 '특강'이 아닌 인터뷰를 위한 것임을 비로소 깨달은 듯했다.

조태권(59) 광주요(窯) 회장을 만난 것은, 바로 얼마 전 그가 미국 캘리포니아의 포도밭 동네인 나파밸리(Napa Valley)에서 벌인 행사 때문이었다.

그는 포도밭 주인과 와인제조업자 60여명을 초대해 저녁만찬을 냈다. 이 자체로는 별로 뉴스가 안 되고, 다만 그 내용이 파격적이었다. 백자 사발, 백자 사각테이블매트, 청자 접시, 불고기 내열 자기, 4단 찬합, 밥그릇 등 도자기 1000여 점을 따로 구워 비행기에 실었고, 홍삼 달인 물 5ℓ와 닭 육수 15ℓ, 생선회와 함께 나갈 초고추장 2ℓ, 간장 3ℓ, 후식으로 나갈 밤초, 꿀과 약초를 넣고 60시간 다린 약차 등 핵심 음식재료도 한국에서 들고 갔다. 또 자신이 운영하는 고급한식당 ‘가온’의 요리사 6명을 데리고 갔다. 저녁 한 끼 행사의 총경비만 1억6000만원. 60인분이었으니, 1인당 370만원짜리 식사를 준비했던 셈이다.

―이번 행사에서 한 끼 식사값이 우리 직장인 한달 봉급과 맞먹더군요.

“지금 월급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1000억~2000억 원 바라보는 사업을 하는데, 한 사람 월급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우리 자손들에게 줄 미래의 그것이 중요할까요.”

우리로서는 한 달 봉급과 결코 바꾸고 싶지 않은데, 그의 계산법은 다른 모양이다. 그의 말에 또 불이 붙었다. 통계 수치까지 줄줄 인용했다.

“전세계에서 자동차 시장은 1320조원, IT 산업 시장은 2700조원인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식품 산업 시장은 4800조원이며, 이중 외식 산업이 2300조원입니다. 이런 큰 음식 시장에서 우리 몫이 없어요. 우리 것이라고 아직 보여준 게 없었으니까요.”

▲ 조태권 광주요 회장은‘식(食)문화’에 19년 동안 자신의 재산을 털어 넣었다. 그는“2300조원 규모의 외식 산업에서 한국음식의 몫을 찾고 싶다”고 말했다.

―이런 이벤트로 한국 음식의 세계화라는 꿈이 이뤄질까요?

“저는 엄청난 거라고 봅니다. 나파밸리는 와인 생산량으로 볼 때 21세기 미국과 전세계의 식문화 중심이 될 것입니다. 와인이 있는 곳은 전세계 음식이 다 들어갑니다. 고급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은 세계의 부호(富豪)들이고 이들끼리는 다 친합니다. 이들이 전세계의 식산업을 이끌어가는 축이지요.

제가 왜 거기서 행사를 했느냐, 결국 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않고선 우리 음식의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지요. 거기 사람들에게 우리 음식이 이 정도라는 걸 보여주고 와인과 잘 맞는다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거죠. 그 자리에서 우리음식과 최고급 와인을 함께 내놓았지요.”

그는 2년 전 나파밸리에 왔다가 ‘할란(Harlan)와인’을 만드는 빌 할란씨를 만났다. 그 집에 초청돼 점심을 하는 자리에서 “2년 뒤에는 내가 한식을 가져와서 맛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이번에 다시 만난 할란씨는 “통상 식사 자리에서 하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당신이 어떤 음식을 가져왔는지 너무나 기대된다. 우리는 불고기와 비빔밥을 먹어본 경험은 있다”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이렇게 이어졌다. “그런데 왜 2년이 걸렸나?” “당신한테 진정한 한식을 보여주기 위해서 2년이라는 준비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음식 그릇까지 다 준비해왔다. 내가 직접 구워 만든 도자기다.” 행사에 참여한 본지의 김성윤 음식담당기자는 “이날 한식 코스는 참석자들에게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영웅(hero)’처럼 대접을 받았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이번 행사는 그들에게 일회성의 기억으로만 남겠지요.

“음식이란 한번 각인되면 계속 갑니다. 음식은 포장이지요. 그릇과 테이블과 세팅과 꽃과 거기에 모든 소품들과 그 분위기와 거기 온 손님, 음악, 술, 모든 게 음식을 위해 포장하고 있는 거죠. 이런 음식은 결코 잊히지 않을 겁니다. 행사 한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제 사업으로 이어 가는 게 중요합니다. 문화는 돈을 벌 수 있는 가능성을 하루아침에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공하면 그건 영원히 보장되는 사업입니다.”

―행사를 준비할 때 주변에서 무슨 말을 안 들었습니까?

“정신 나갔다고 하고, 괴짜라고도 했죠. 괴짜 아니면 이걸 하겠습니까.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사업은 보이는 사람만 하는 겁니다.”

-보인다니? 돈이 보인다는 뜻인가요?

“돈은 물론이고, 돈보다도 가치가 보이는 사람에게 돈은 따라오는 겁니다. 가치는 아무나 만드는 게 아닙니다. 가치가 만들어질 때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아무나 만들 수 있으면 아무나 하겠죠.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사업이겠죠. 아무나 할 수 없는 사업은, 선택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거라고 봅니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런 철학을 갖고 있는데, 실제 경영에서 수지를 맞추고 있습니까?

“아직은 전혀 안 되죠. 누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 바보 아닌 이상 이런 데 돈을 투자할 수 없다고. 하지만 저는 그전에 다른 사업으로 돈을 벌었기 때문에 그 돈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숙명적인 거라고 봅니다. 힘든 길을 다 설명하기 어려우면, 그저 팔자라고 받아들이는 게 속 편하지요.”

그는 광주요(窯: 도자기) 창업자인 조소수 선생의 아들이다. 미국 미주리산업대 공업경영학과를 나와 대우에서 해외근무를 했다. 거기서 독립해 중동에서 무기·중장비 장사를 했고, 그의 말대로라면 엄청난 성공을 했다. 그러던 중 부친이 타계하자 1988년 광주요를 이어받았다.

―가업을 안 이어받았다면 인생이 어떠했을 것 같습니까?

“한국에 안 들어왔을지도 모르고, 어쩜 아주 타락했을지도 모르고, 다른 엉뚱한 데로 갔을지도 모르죠. 분명한 것은 지금처럼 식문화를 떠드는 ‘문화인사’처럼 분류되지는 않았겠지요. 당시 어머님이 ‘가업을 네가 맡아줄 수 있겠니?’라고 했을 때, 과거에 효도도 못했고, 어떻게 하면 어머님을 기쁘게 해드릴까 하는 마음에서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시작했던 것이지요. 지금 생각하면 도자기란 사업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내가 죽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저는 급하고 돌진하는 스타일이었지요. 중동에서 무기 장사를 하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도 발생하니까요.”

―그런 체질인데 도자기 사업을 맡았으니 좀 따분했겠군요.

"도자기 사업처럼 어려운 일은 처음 만났어요. 도자기는 제게 기다리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인내를 키워주는 겁니다. 제가 아무리 똑똑하더라도 도자기 성분은 불에 들어갔다가 어떻게 나올지 모릅니다. 3개월이란 시간이 걸립니다. 원하는 것이 안 나오면 또다시 해야 합니다. 3개월에서 또 3개월. 도자기 사업을 안 했다면 나는 인내심도 없고, 내가 살아온 길을 돌아보지 않았을 겁니다."

―사업은 현실인데, 적자 나는 사업을 계속 끌고 갈 수 있을까요.

"처음에 도자기에 음식을 담고 음식재료를 고급화하니까, '한식은 이렇게 비싸면 안 돼' 라는 말들을 많이 들었지요. 그 말씀을 하시는 많은 사람들은 뒤에서 발렌타인 30년산을 마시고, 10만~20만원짜리 와인을 먹고, 룸살롱을 갑니다. 일식집에서는 15만원씩 주고 먹으면서 우리 한식은 10만원만 돼도 비싸다고 합니다. 우리 것을 낮게 보기 때문에 우리 것은 비싸면 안 된다는 생각이지요.

정말 어려운 시간을 많이 보냈지요. 아내가 '그만 접고 해외에 나가서 살자'고 했습니다. 사실은 5년 전쯤 그만둘까 했지요. 그런데 식문화라면 도자기와 음식, 그리고 술이 있어야 완성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술도 만들기 전에 중단하면 지금까지 해온 것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술까지 만들어보고 그만두겠다'고 마음먹고, '화요(火堯)'라는 술을 만든 겁니다. 술을 만들고 보니 이제는 갈 데까지 너무 가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어요. 내 모든 걸 넣어야 하겠더라고요. 집사람에게는 '어느 누가 할 수 없는 걸 내가 만들어 놓으면 내가 성공하든 안 하든 누군가가 이어간다. 그것만으로도 내가 사회에 공헌한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최면에 걸리는 것처럼, 이제 이렇게 생각이 굳어져 버렸어요."

―그런데 '고급'을 너무 강조하면,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을까요. 일반 서민들은 고급한식당 '가온'(서울 강남구 신사동 소재)에 어디 걸음을 들여놓을 수 있겠습니까?

"맞습니다. 그러나 모든 문화는 '사치(奢侈)'에서 시작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그것이 신분의 척도였죠. 그림과 음악과 오페라가 처음 누구를 위해 만들어졌습니까. 건축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결국 돈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 만들어지던 것이, 생활 수준이 좋아지면서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며 밑으로 확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문화에서는 이처럼 전세계적으로 사치스럽고 고급스러운 게 있느냐 하면, 그게 없습니다."

―국내의 일반 사람들을 상대로 하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우리는 5000만명을 보고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끼리만 얘기하면 언젠가 고립되고 맙니다. 앞으로 전세계 중산층은 20억명쯤 늘어나는데, 이들을 상대로 시장을 개척해야지요. 일례로 제가 홍계탕(홍삼과 오골계를 넣고 끓인 육수에 쌀을 넣고 쑨 죽)이란 걸 만들었어요.

제일 비싼 게 30만원입니다. 얼마 전 미국판 시사주간지 타임에 한국에 가서 즐길만한 요리로 소개된 것이지요. 이를 누구나 먹자는 게 아닙니다. 최고의 음식을 먹는 사람이 왔을 때 그 사람에게 대접하자는 거죠.

국내 대기업 초청으로 두바이의 왕자들이 왔을 때 우리 식당에서 저녁 만찬이 있었지요. 그때 홍계탕을 내놓았습니다. 다음날 이 왕자들이 ‘또 먹고 싶다’며 호텔 숙소로 다섯 그릇을 주문해 갔습니다. 며칠 전에 바로 그 친구들이 또 방한했어요. 이번에는 우리 식당에 안 들르고 떠나게 됐는데, 갑자기 연락이 와 ‘그때 먹었던 홍계탕 13그릇을 자가용 비행기로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직원들이 공항으로 배달해줬더니 540만원을 결제했습니다. 슈퍼스타가 있어야 주연이 만들어지고, 조연도 만들어 집니다. 또 그 조연 속에서 주연이 나오는 거죠. 식문화도 같은 이치입니다. 이런 경쟁 속에서 우리 전체 식문화가 발전된다는 거죠.”

―우리 음식의 가장 큰 약점은 무엇일까요?

“사실 포장입니다. 음식 맛의 절반은 시각에 달린 것이지요. 맛은 단맛, 짠맛, 쓴맛, 신맛…, 이걸로 다 구분이 됩니다. 하지만 시각적인 맛은 끝이 없습니다. 아무리 맛이 쓰더라도 좋은 분위기에서 ‘이게 약이오’ 하면 그냥 먹을 수 있습니다. 반면 분위기가 엉망인 데서 ‘이거 약이오’ 하면 내가 이거 먹고 탈 나는 거 아닌가 생각합니다. 멋진 그릇에 담으면 2만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을, ‘포장 그게 왜 필요해’라며 1만원에 팔고 있다는 거죠.”

―평소 먹는 데 까다롭습니까?

그는 싱긋 웃으며 “나는 굉장히 편합니다. 무슨 음식이든 좋아합니다”라고 말했다.

“다만 저는 ‘음식을 어떻게 하면 더 멋있게, 더 맛있게 할 수 있을까’를 항상 생각합니다. 이번 미국 행사에서도 그 메뉴를 제가 다 짰습니다. 제가 손님들을 어떻게 놀라게 해줄까, 이들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걸 뭔가 기대를 하게 만들까라고. 그리고 미리 네 번의 시연(試演)까지 했지요.”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해도 서로 수준의 잣대가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나는 깨달았다. 본인은 굉장히 편하다는 게, 내게는 충분히 까다로운 것이었다.

―어떤 종류 음식을 좋아하시는지?

“김치찌개입니다. 저는 김치찌개를 족발을 넣어 만들어 먹기도 하고, 별거 다 만들어 봅니다.

음식 하면 우리 주방장보다 낫습니다. 저는 인터넷으로 아스파라거스 시즌은 언제이고, 랍스타는 어디서 어떻게 되고 있고, 다른 나라의 음식 재료가 무엇이 있는 지를 보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요즘 하는 일이 재미있지요?

“재미있다기보다는 꼭 해야 한다는 의무, 그것이 나를 밀고 가고 있지요. 식문화 개선은 많은 사람들의 힘이 모여야 하는 거지. 이제 뭔가 싹을 틔웠구나, 뿌리를 내렸구나. 이런 안도감이 들 때는 뿌듯하지요. 하지만 즐겁지는 않아요. 사업가로서 즐거운 것은 ‘돈이 들어왔더라’는 말을 듣는 겁니다. ‘나 돈 벌었다. 한번 살 게’라고 호기를 부릴 때 즐거운 거지요. 과거 무기를 팔 때는 개수로 팔았지만, 이제 음식은 문화 전체로 파니 훨씬 단위가 크고 해볼 만합니다.”

―일부 소수의 고급음식과 문화만 이야기해, 한국 보통사람들의 평등의식을 자극할지 모르겠군요.

“우리가 거기 매달려 있으면 결코 발전을 못합니다. 어느 누가 돌을 맞더라도, 부러질 건 부러지자는 거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계 역사를 봐도 언제나 그렇게 해 왔고. 역사 흐름을 거스를 수 없듯이 그건 그대로 갈 거라는 거죠.”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외부 강연을 하시나요?

“강연도 많이 하죠.”

―강연료 수입도 많이 들어오죠?

그도 웃었다.

미국 캘리포니아 와인메이커들 반하게 한 요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