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교에서 믿는 신(神)은 ‘알라 신’이다.” 이 진술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면, 아랍어로 번역된 성경에서 ‘하느님(하나님)’을 ‘알라’로 표기한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아랍어의 ‘알라’는 영어의 ‘갓(God)’, 중국어의 ‘천주(天主)’, 히브리어의 ‘야훼’와 같은 뜻으로 일신교에서의 신을 말한다. ‘알라 신’이라는 말은 ‘하느님 신’이라는 표현이나 마찬가지이며, 마치 다신교에서 여러 신 중 한 신의 이름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그런데도 많은 현행 교과서들이 여전히 ‘알라 신’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 책은 분명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고 배우고 있는 ‘세계사’라는 과목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우리 교과서에 담긴 ‘세계’는 ‘세계’가 아니다. 유럽·미국과 동북아시아만 중심에 놓고, 그 지역 밖에 있는 더 넓은 세상과 더 많은 사람들은 구색 맞추기로 끼워 넣었을 뿐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그 나머지 지역 전공자’들의 합종(合縱)이자 반격이다. 중앙유라시아(이평래), 동남아시아(조흥국), 인도(이옥순), 서아시아와 이슬람(이희수), 아프리카(한건수), 라틴아메리카(이종득), 오세아니아(이태주)라는 ‘교과서에서의 7대 마이너 지역’으로 나누고 현행 중·고교 역사·지리 교과서들을 분석했다.

그 결과는? 한 마디로 우리 세계사 교과서는 ‘오류와 편견으로 가득했다’. 우선 분량의 문제다.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는 한 단원으로조차 독립돼 있지 않고, 중앙유라시아와 오세아니아는 아예 세계사 교과서 본문에 등장하지도 않는다. 적은 분량이나마 수록된 내용들 역시 문제투성이다. 우리가 가끔 다른 나라의 교과서에 ‘과거 한국이 중국이나 일본의 속국이었다’고 돼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 나라 교과서를 보면 분통을 터뜨릴 내용이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몇 가지 오류부터 살펴보자. ▲몽골 유목민들의 이동식 천막을 교과서는 ‘빠오’나 ‘파오’라고 써 놓았다. 이것은 몽골 말이 아니라 다름아닌 중국어 ‘포(包)’에서 온 것일 뿐이다. 마치 외국 교과서에서 우리 ‘김치’를 ‘기무치’로 소개한 꼴이 아닌가? 몽골 말대로 ‘게르(ger)’로 바꿔야 한다. ▲원(元)나라 때 중앙아시아 사람들을 일컫던 ‘색목인(色目人)’이란 ‘눈동자[目]의 색깔[色]이 다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진술은 타당한가? 그것도 아니다. ‘색목인’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라는 뜻인 ‘제색목인(諸色目人)’의 준말이다. ▲카스트 제도의 ‘수드라’가 노예와 천민 계급이라는 표현도 맞지 않다. 그것은 고대 경전에서의 구분일 뿐이며 실제로 ‘수드라’는 평민으로 봐야 한다. 노예나 천민은 수드라보다 더 낮은 계층으로 카스트 제도 바깥에 있는 ‘불가촉 천민’이다. ▲원래 백인이 흑인 노예를 경멸적으로 부르는 말이었으며 지금은 세계적으로 금기어가 된 ‘니그로(negro)’라는 용어가 여전히 교과서에서 쓰이고 있다. ‘아프리카는 니그로 인종의 본고장’이라는 교과서의 문장을 흑인 민권운동가들이 본다면 19세기 서구 백인의 인종주의가 21세기 대한민국에 살아 있다며 놀랄 것이다.

하지만 독자들이 반드시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지식의 오류를 교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여태껏 세계사 교과서를 통해 배워 왔던 ‘세계관’ 자체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는 깨달음이 거기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선 교과서의 다음 문장을 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리스 군대를 이끌고 동방 원정을 단행했다.” “영국은 지중해와 중앙아시아 방면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이번엔 다음 문장. “아프가니스탄의 투르크 족이 11세기 전반부터 인도를 침입했다.” “인도 서북쪽으로부터 이슬람 교도가 침략해 이슬람계 국가들이 등장했다.” 똑같은 무력 점령이라도 유럽이 하면 ‘원정’ ‘확장’ ‘진출’이라는 긍정적 용어가 나오는 반면, 아시아가 하면 ‘침략’ ‘침입’ ‘약탈’이 된다.

인도의 역사와 문명이 고대 힌두교와 이슬람교 같은 종교를 중심으로 서술되고 근·현대 문명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는 것은, 은연중에 인도에는 고대만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영국의 제국주의적 역사 서술을 답습하고 있는 셈이다. 오세아니아는 ‘양떼의 천국’으로 묘사되는데, 2만5000여 개나 되는 다채로운 섬들과 그 원주민들의 삶은 교과서에서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다.

이것은 현재의 경제력을 중심으로 세계의 역사를 인식한 결과가 아닐까? 이 책의 저자들은 묻는다. 서구 강대국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제3세계를 타자(他者)로서 바라보며 그 실체를 파악하는 대신 신비화하거나 멸시하는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이 한국의 교과서 집필자들에게까지 그대로 전해져 다시 학생들의 세계관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인도에서) 누더기 승려복을 걸치고 몰골이 흉하게 생긴 사람이 거리에서 구걸하고 있다” “(아프리카는) 타잔과 제인이 때묻지 않은 자연 속에서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던 곳”이라는 문장이 교과서에 버젓이 등장할 수 있었을까.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 교과서에 중국 ‘동북공정’의 기본적인 논리가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교과서도 유라시아 초원 지대에서 활동하며 세계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유목인들을 하나의 문명권으로 설정하지 않았고, 때로는 마치 중국사의 일부인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그들의 활동 무대였던 동서 교역로는 ‘동쪽 끝’ 사람들과 ‘서쪽 끝’ 사람들이 물자를 거래하던 통과 지점으로만 인식되고 있으며, 정작 그 ‘길’의 주인공이 누구였는지는 묻지 않고 있다. 유목민이 ①떠돌다가 ②물자가 부족해서 ③정착민을 약탈한다는 도식적인 서술은 ‘농경세계는 문명이며 유목세계는 야만’이라는 중국인들의 오래된 한족(漢族) 중심주의와 무엇이 다른가?

그렇다면, 교과서가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 학계의 지식 수입원(收入源)이 전근대의 중국과 근대 이후의 서구·일본뿐이었던 데 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세계’는 진짜 ‘세계’가 아니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