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전주에 일본인 떠돌이 두 명이 나타났다. 처음 본 일본 옷차림에 개들이 짖어댔고 동네 사람과 꼬마들이 따라다녔다, 야마구치현 출신의 이노우에(井上)와 모리나가(守永)는 서문 밖에 허술한 집을 지었다. 행상으로 전주 서문·남문시장에서 사탕과 거울, 석유 등 잡화를 팔았다.
일본인들은 처음 전주 성내에서 살지 못하고 좌판을 펼 수도 없었다. 1905년 통감부 설치로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1910년 1432명으로 불어났다. 관리와 목공, 잠업인, 중개인 등으로 직업도 다양해졌다. 이들은 1907년 전주~군산 간 첫 신작로를 내고 성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성벽이 모두 헐린 1910년대 일본인들은 성내 땅 30만평을 모두 차지해버렸다.
전주문화재단이 전주의 근대 100년을 복원하고 있다. 첫 작업으로 해방 전의 생활사를 집중 조명한 ‘일제 식민시대 구술실록’(1907~1945)을 펴냈다. 일제 강점기를 겪은 70~99세 노인 77명의 구술을 당대의 사진 240여장을 곁들여 기록하고 있다.
‘실록’은 파괴된 전통도시 위에 식민도시가 들어서고, 서양 문물과 근대 교육이 뿌리내리는 과정과 가난하고 남루했던 근대 생활의 편린 등을 기술했다.
학생들은 10리를 걸어 학교를 다니면서 송아지를 팔아 학비를 마련했다. 오목대와 한벽루는 시절에 아랑곳 없는 소년들의 놀이터였다. 덕진연못은 그 때도 인기 있는 소풍 장소였다.
학생들은 취직이 잘되는 농업학교로 진학했다. 전주의 공장은 전매국 담배공장과 제사공장 2곳 등 3곳이 전부였다. 혼인과 신접살림, 고달픈 직장생활, 초가 장옥의 시장, 세시 풍속과 관혼상제의 모습들이 흑백사진과 함께 추억으로 자리잡았다.
전주는 고암 이응로 화백이 간판 그림으로 생계를 이은 곳이었고, 음악가 현재명이 신흥학교 교사로 음악을 가르치던 곳이었다.
학생들은 야구시합에서도 민족 차별을 겪으면서 3.1만세에 앞장서고 동맹 휴학으로 감옥에 갔다. 조선어 수업이 사라지는 가운데 기독교를 중심으로 저항은 이어졌고, 징용을 피해 만주로 떠나기도 했다. 일본인들은 패망과 함께 ‘자경단’의 으름장 속에 봇짐을 메고 전주를 떠났다.
‘실록’은 무궁무진한 구술들에서 ‘개인 무용담’을 걸러내고 구어체로 적어 실감을 더했다. 문화재단은 전주 토박이 노인들을 찾아 기억을 되살리게 하면서 그 연대를 복원했다. 생활사는 증언자 나이의 한계로 1930~40년대사가 중심이 된다.
집필한 장명수 전주문화재단 이사장은 “적어도 10년 전에 정리했어야 했다”며 “그나마 일부라도 채록해 전통과 현대의 교차공간을 재구성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전주문화재단은 해방 이후 전주의 현대사도 복원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