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스승에게 검을 다루는 법을 배우는 순례자의 가장 큰 적은 자신의 한 손이랍니다. 자신을 해치는 것은 적이 아니라 검을 쥔 자기 자신이라는 거지요. 파울로 코엘료의 말입니다. 무서운 적은 언제나 내부에 있습니다. 실제로 상실보다 무서운 건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고, 고독보다 무서운 건 고독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두려워하면 “게임 끝”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는 두려움을 벗어버린 자의 자유의 노래입니다.

니체에게 자유란 무엇일까요? 자유는 방종도 아니고, 책임도 아닙니다. 도덕도 아니고, 반(反)도덕도 아닙니다. 정치이념도 아니고, 선택에의 의지도 아니고, 무료한 일상을 달래줄 거짓 사랑에의 욕망도 아닙니다. 자유란 온 몸으로 내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내가 되지 않을수록 ‘좋은 사람’으로 살 확률이 높지만, 내가 되지 못한다면 천지를 얻어도 늘 불안할 뿐입니다. 나로 살기 위해 차라투스트라가 제시한 것은 고독이었습니다.

“벗이여,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사납고 거센 바람이 부는 곳으로!” 사나운 바람이 부는 곳은 시끌벅적한 장터가 아니라 광야입니다. 한 존재를 고독한 광야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만드는 힘, 그것이 바로 우리 존재의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자유의 힘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고독 속으로 걸어 들어가지 못할까요? 우리에게는 왜 본능 같고 의지 같은 자유가 힘을 발휘하지 않는 걸까요? 태평스럽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왕따 당하지 않으면서, 주목 받으면서! 이상하지요? 태평스러운 삶에 길들여질수록 진정한 만남이 이뤄지지 않으니. 문제 일으키지 않고 태평스럽게 살기 위해 우리는 정말로 많은 가면들로 나 자신을 감추고 있으니까요. 아마 ‘나’조차도 나를 본 적이 없을 겁니다. 가면들을 벗고 나를 보기 위해서 니체는 상식적인 평균인들을 떠나, 예수도 거쳐 갔던 그곳, 거센 바람이 부는 버려진 땅, 황량한 광야 속으로, 광야의 고독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입니다.

“벗이여,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너는 하찮은 자들과 가엾은 자들을 너무 가까이에 두고 있다. 저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앙갚음에서 벗어나라! 저들이 네게 일삼는 것은 앙갚음뿐이니.”

▲ 이주향 수원대 교수

고독은 인간을 내면화하고, 내면화된 인간은 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돌봅니다. 내 안에서 한숨이 되고 있는 것, 나를 경직되게 만들었던 것,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 그 모두는 내 마음의 버려진 광야입니다.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십시오. 두려움 없이 정직하게! 그러면 내가 품어야 할 것이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내 안의 생명력을 돌보게 만드는 니체학술대회가 니체학회와 경기문화재단의 주최로 19일(금) 오후 2시 수원대학교 종합강의동에서 열립니다. 주제는 ‘니체 사상과 새로운 문화 패러다임의 가능성’이고, 누구든 참석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