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울로 돌아왔다. 그녀는 홍대 정문 앞에 차를 세웠다.

“믿지 않겠지만 어제까지 내 수중에 웬만한 대기업 신입사원의 연봉 정도 되는 거금이 있었어.”

“내가 좀 빌려줄까?”

“아아니.”

나는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다시는 돈 같은 것은 빌리고 싶지 않았다.

“고시원의 그 여자 때문에 그래?”

지원이 새침하게 물었다.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죽은 여자와의 채권 채무까지 부러워하는 것도 질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응, 아니.”

“예스야 노야?”

“잘 모르겠어. 하지만 너한테 돈을 빌리고 싶지는 않아.”

“그럼 오늘 밤에 어디서 잘 거야? 대책은 있어?”

“나한테 일자리를 주겠다는 사람이 한 명 있어. 그리고 거기는 여기서 걸어갈 수도 있는 데야.”

“정말이야?”

그녀가 미심쩍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내일 전화할게. 오늘 정말 고마웠어. 그 먼 데까지.”

“또 없어지면 안 돼. 아, 그땐 정말….”

그녀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이젠 그런 일 없을 거야. 난 이제 어디로도 도망가지 않을 거야. 저녁에 전화할게.”

“그래. 전화해.”

한참을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아직도 그녀는 차에 올라타지 않은 채 전쟁 미망인 같은 자태로 서서 내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녀는 그제야 차에 올라탔다.

그녀가 떠난 후 나는 연남동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곰보빵 할아버지의 제안이 아직도 유효하다면 당분간은 그 집에서 그 꼴 보기 싫은 노인네의 손발 노릇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연남동까지 걸어가면서 〈회사〉에서 번 돈을 생각했다. 아, 그 돈만 있었다면 이렇게 구차해지지 않아도 될 텐데. 정말 곰보빵 할아버지에게 손을 벌리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단 말인가? 비참한 기분이었다. 왜 다른 사람에게는 흔해 빠진, 그래서 다들 지긋지긋해하는 피붙이 하나도 내게 없단 말인가? 나는 연남동의 옛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이런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수십 가지의 직업을 떠올려 보았다. 지하철에서 우산을 팔까? 목욕탕에서 때를 밀까? 막노동을 할까? 전자상가에서 호객을 할까? 로바다야키 식당에서 감자를 깎을까? 아니면 다시 편의점이나 피시방에서 알바를 할까? 그러나 이 모든 경우에도 최소한 눈 붙이고 잠잘 곳은 필요했고 그러려면 보증금도 있어야 했다.

▲ 그림= 이우일

나는 어느새 연남동 옛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벨을 누르자 한참 후에야 문이 열렸다. 김 실장이 나를 곰보빵 할아버지가 음악을 듣고 있는 거실로 데려갔다.

“안녕하세요?”

그는 에디트 피아프를 듣고 있었는데 내가 몇 번을 인사해도 대꾸가 없었다. 김 실장이 리모컨을 들어 오디오의 볼륨을 낮췄다. 그제야 그는 내 존재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할아버지, 잘 지내셨어요?”

“아니. 자꾸 가래가 끓어. 아무래도 공기 좋은 시골로 내려가야 할까봐. 그런데 누구?”

“민수예요.”

“민수? 아, 그런데 웬일이야?”

“전에 말씀하신 거 있잖아요?”

“뭐?”

“집사…건 말이에요.”

“집사라니? “

“왜 집에 들어와서 일을 좀 봐달라고 하셨잖아요?”

“내가? 언제?”

나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필요 없으신 거예요?”

“도무지 무슨 소린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곰보빵 할아버지가 생각난 듯 말을 꺼냈다.

“아, 참, 민수, 민수라고 그랬지. 예전에 여기 있던 책, 어디 갖다 팔았나?”

“네.”

“그 책방 주인이란 작자가 한번 와서 찾던데?”

“왜요?”

“그걸 내가 알 리가 있나? 자네 연락처를 줬더니 자기도 전화번호는 있대. 그런데 연락이 안 된다나.”

“한 몇 달 산에 들어가 있었거든요.”

“불법 다단계라도 한 거야? 돈 좀 만졌어?”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더 하실 말씀 없으면 저 이만 가보겠습니다.”

“참, 잘 데 없으면 방은 며칠 써도 돼. 남도 아니고 그래도 명색이 인숙이 손주인데.”

“고맙습니다.”

나는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대문까지 따라나온 김 실장은 곰보빵 할아버지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고 슬쩍 귀띔해 주었다. “그게 한 번 걸리면 다시 좋아지지는 않는다던데….” 어쩐지 노인네가 치매에 걸린 것을 고소해 하는 말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