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묘(太廟)·청묘(淸廟)·비궁( 宮)이라고도 불렸던 종묘(宗廟)는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신 왕조의 신성한 장소였다. 조선은 개국 직후 고려 국왕의 제사를 모시던 개경의 효사관(孝思觀)에 태조의 고조부 목조(穆祖)부터 부친 환조(桓祖)까지 추존(追尊)한 네 조상(四祖)의 신주를 모셨다가 태조 4년(1395) 서울의 종묘로 옮겼다. 종묘 제사는 아무 짐승이나 천신(薦新)할 수 없었다. 왼쪽 표( ·어깨 뒤 넓적다리 앞 살)에서 오른쪽 우( ·어깻죽지 앞 살)로 관통한 상살(上殺)만 올릴 수 있었다. 그보다 등급이 낮은 것이 오른쪽 귀 부근을 관통한 중살(中殺)로서 빈객(賓客) 접대에 사용했으며, 왼쪽 비(脾·넓적다리 뼈)에서 오른쪽 연(어깨 뼈)을 관통한 하살(下殺)은 주방에서 사용했다.
종묘는 왕조의 상징이었기에 국난(國難)을 예견하기도 했다. 임란 2년 전인 선조 23년(1590) 종묘의 화재를 초동 진화한 후 조사해보니 종묘 수복(守僕·종묘를 지키는 종) 이산(李山) 등이 금·은을 빼돌리고 불을 질러 은폐하려 한 것이었다. 주범 이산과 그 주인 황치단(黃致段)을 비롯해 수십 명이 사형당했고, 선조도 소복(素服) 차림으로 곡림(哭臨)해 선왕의 혼령에 사과해야 했다. ‘선조수정실록’은 ‘도적들이 종묘 안에서 유숙했기 때문에 배설물이 낭자했다’고 적고 있고, 사관(史官)은 이때 ‘식자들은 장차 환란이 일어날 조짐임을 알았다고 한다’라고 전한다. 서애 유성룡의 ‘전란 후의 일을 적다(記亂後事)’에 의하면 일본군 사령관 다이라 히데이에(平秀家)가 종묘에 머물렀을 당시 왜군들이 갑자기 죽는 일이 발생하자 ‘종묘는 신령이 있기 때문에 오래 머물 곳이 못 된다’며 송현동(松峴洞)에 있던 남별궁(南別宮)으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종묘 망묘루(望廟樓)는 정조가 재위 14년(1790) 12월 12일 다음날 제사를 준비하며 밤을 새웠던 곳이기도 한데, 이곳에 역사자료관을 설치해 일반에게 개방한다는 소식이다. 시민들에게 다가가려는 자세는 좋지만 선왕들의 자취가 훼손될까 우려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