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이상학 객원기자] 지난해 10월 이승엽(31)의 거취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일본 프로야구 진출 3년째를 맞아 이승엽은 타율 3할2푼3리·41홈런·108타점이라는 가공할 만한 활약으로 주가가 껑충 뛰어올랐다.
메이저리그에 도전할지 아니면 일본에 잔류할지를 놓고 온갖 설이 난무한 가운데 이승엽의 최종 선택은 요미우리 잔류였다. 이와 함께 한 가지 바람도 덧붙였다. “하라 감독을 반드시 도쿄돔에서 직접 헹가래쳐 주고 싶다”.
약 1년의 시간이 흐른 지난 10월 2일. 이승엽은 바람대로 도쿄돔에서 하라 다쓰노리 감독을 헹가래치고 있었다.
▲ 하라 감독의 특별한 믿음
이승엽은 지난 시즌을 앞두고 지바 롯데를 떠나 전격적으로 요미우리 입단을 결정했다. 그러나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인의 무덤’이나 다름없었던 요미우리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 비관적인 시선도 많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승엽은 개막전부터 요미우리의 제70대 4번 타자로 시즌을 시작해 마칠 때까지 4번 자리를 지켰다. 시즌 전만 하더라도 이승엽의 4번 낙점은 분명 의외의 결정이었다. 2005년 지바 롯데에서 30홈런을 쳤지만 끝내 플래툰 시스템을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지만 3년 만에 요미우리 사령탑으로 복귀한 하라 감독의 믿음과 배려도 크게 작용했다.
하라 감독이 이승엽을 믿고 지지한 것은 궁극적으로 성적이 좋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이승엽의 성적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4번 타자로서 위압감도 컸다. 하지만 실력만큼이나 높이 평가된 것이 바로 야구에 대한 열정과 남다른 책임감이었다. 지난해 요미우리는 주축 선수들이 차례로 줄부상을 당해 전력에 큰 차질을 빚었지만 이승엽은 3경기밖에 결장하지 않았다. 특히 6월 7일 소프트뱅크전에서 왼손가락을 다쳐 다음날 결장했으나 이튿날 경기에 복귀해 일본 진출 후 처음으로 연타석 홈런을 터뜨리며 하라 감독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올해도 다르지 않았다. 하라 감독은 올 스프링캠프에서 에이스 우에하라 고지를 비롯해 10여 명에 달하는 주축 선수들이 이런저런 부상으로 훈련에 차질을 빚자 격노한 바 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승엽은 묵묵히 훈련에 임했다. 올초 모친상을 당해 무릎 수술 후유증 극복에 제동이 걸렸지만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친상으로 부족했던 훈련량을 보충하는 데 힘을 썼고, 이는 자연스레 믿음의 축적으로 이어졌다. 물론 이승엽에게도 하라 감독은 반드시 보은을 해야 할 ‘귀인’이었다. 2005년 136경기에서 125개의 선발 라인업을 들고 나온 바비 밸런타인 감독과 코드가 맞지 않아 남몰래 마음고생을 한 이승엽에게는 더욱 그랬다.
▲ 부상과 부담 그리고 부진
그러나 2007시즌은 이승엽에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겨우내 수술 받은 왼쪽 무릎 여파로 하체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은 탓에 몸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었다. 게다가 개막전부터 고질적인 왼쪽 어깨 통증이 밀려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4월말부터는 왼쪽 엄지에 울림 증상이 찾아왔다. 이승엽은 그동안 부상과는 거리가 먼 선수였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무릎에다 통뼈를 갖고 있다. 대구구장의 딱딱한 인조잔디에서도 이렇다 할 부상이 없었다. 그만큼 부상에 대한 대처 방법이 더욱 미흡할 수 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하라 감독의 운명이 걸린 2007시즌 한꺼번에 찾아온 부상이라 더욱 야속했다.
부상 못지않게 심적인 부담도 컸다. 요미우리 4번 타자라는 부담감도 컸지만 일본 프로야구 최고 연봉선수(6억 5000만 엔)라는 부담감이 이승엽을 옭아맸다. 초대형 장기계약을 맺은 선수에게는 첫 해가 중요하다. 첫 해 몸값을 하지 못하면 곧바로 ‘먹튀’라는 안 좋은 이미지가 따라붙는다. 몸이 성하지 않은데 심적인 부담까지 더해지면서 타석에서 투수를 압도하는 위압감도 사라졌다.
그때마다 하라 감독은 “누가 뭐래도 거인의 4번은 승짱”이라며 주눅든 이승엽의 사기를 북돋아줬다. 덕아웃에서 기도하는 모습이 좌절하는 모습으로 비쳐지자 고개를 숙이지 말고 당당하게 나설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상과 부담이라는 그늘은 이승엽을 덮어버렸다. 올 시즌을 끝으로 계약기간이 만료되는 하라 감독으로서도 언제까지 무기력한 4번 타자를 믿고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6월 9일 라쿠텐전에서 이승엽을 처음으로 4번 타순에서 제외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하지만 하라 감독은 경기 후 “창자가 끊어지는 심정으로 한 결정”이라며 “승짱이 4번으로 복귀할 때 진짜 자이언츠가 된다”고 따뜻한 배려를 했다. 그렇다고 이승엽에게 채찍을 들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승엽의 부진이 계속되자 “부진이 너무 길다”, “4번 타자답지 않은 플레이”라며 따끔한 충고도 마다하지 않았던 하라 감독이다.
▲ 극적인 복귀, 극적인 보은
이승엽은 7월12일 2군행을 자처했다. 성적도 안 좋았지만, 무엇보다 부상당한 엄지 통증이 극에 달한 시점이었다. 상태는 생각보다 더 안 좋았고 수술을 고려할 정도였다. 수술을 하면 시즌을 접어야 했다. 완치를 위해서라면 수술을 서둘러야 했지만 이승엽의 책임감이 다시 한 번 결정을 망설이게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라 감독이 이승엽에게 부상을 안고서라도 시즌을 마쳐줄 것을 부탁했다. 이승엽은 수술을 시즌 뒤로 미루고 시즌을 강행하기로 결심했다. 극적인 복귀였다. 하라 감독 역시 김기태 육성군 코치를 이승엽의 1군 복귀 일에 맞춰 함께 1군으로 올리면서 이승엽이 보다 심적인 안정감을 갖도록 배려했다.
이승엽은 후반기 시작과 함께 1군에 복귀해 첫 6연전에서 4홈런을 터뜨리며 부활을 알렸다. 타순은 4번이 아닌 5번이었지만 이 역시 하라 감독의 배려였다. 이에 보답하듯 이승엽도 하라 감독의 지시에 따라 희생번트까지 감행할 정도로 자존심을 버렸다. 철저히 하라 감독과 우승을 위해 자신을 팀에 용해시켰다. 게다가 8월 중순부터는 엄지에 착용한 충격흡수용 고무 보호대까지 벗어던졌다. 타격을 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과감하게 보호대를 떼어버린 것이다. 마운드의 집단 붕괴로 팀이 한창 어려울 때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림으로써 팀의 단결력을 고취시키까지 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요미우리는 시즌 중반까지 보여준 투타 밸런스를 잃어버린 채 주니치와 한신으로부터 맹추격을 받더니 한때나마 센트럴리그 3위로까지 추락했다. 9월 7일 한신을 상대로 일본 진출 첫 한 경기 3홈런의 맹폭을 퍼부은 이승엽은 9월 9일부터 37일 만에 4번 타자로 복귀했지만 이날 경기에서 한신의 외국인선수 앤디 시츠의 고의적인 플레이로 왼쪽 발목을 짓밟히는 고초까지 겪었다. 하지만 신사로 소문난 하라 감독이 눈에 불을 켜고 발목테러를 당한 이승엽을 보호했고 선수단도 다시 한 번 단결했다. 공교롭게도 이날 경기 후 요미우리는 8승4패를 거두며 센트럴리그 1위 자리를 탈환했다.
하라 감독과 이승엽의 결정판은 9월말부터였다. 4번 타자 복귀 후 극도의 부진을 보인 이승엽은 9월 22~23일 요코하마와의 경기에서 6연타석 삼진이라는 고개를 들 수 없는 불명예를 당했다. 하지만 23일 요코하마전에서 0-2로 뒤진 8회말 1사 만루에서 결승 3타점 3루타를 작렬시켰다. “승짱이 팀을 위기에서 구해냈다”며 감격한 하라 감독의 무모하리만큼의 믿음이 기어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기세는 9월24~26일 주니치와의 실질적인 ‘리그 우승 결정전’까지 이어졌다. 첫 경기부터 팀은 패했지만 이승엽은 홈런 하나 포함 4타수 3안타로 맹타를 휘둘렀고, 3연전 마지막이었던 26일 경기에서 결정적인 동점 솔로포로 역전승에 발판을 놓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하라 감독의 진득하고 질긴 믿음이 만들어낸 꽃보다 아름다운 결과였다.
이승엽은 센트럴리그 우승을 확정지은 지난 2일 야쿠르트와의 홈경기에서 4회 동점 투런포를 터뜨리며 3년 연속 30홈런의 위업과 함께 다시 한 번 역전승에 디딤돌을 놓았다. 추정 비거리가 140~150m에 달하는 초대형 우월 홈런으로 타격 컨디션이 완벽하게 회복됐음을 알리는 아치였다. 이승엽은 9회말에도 볼넷으로 출루해 동점 득점에 성공하는 등 극적인 역전극의 중심에 자리했다. 한 시즌 내내 양 어깨에 무거운 쇳덩이를 얹어놓은 듯 고심이 한가득했던 하라 감독도 그제야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띠며 기뻐했다. 이승엽도 비로소 선수단과 함께 하라 감독을 헹가래하며 시즌 전 바람을 실현시켰다.
올 시즌 성적만 놓고 본다면 실망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부상 악재에도 이승엽은 시즌 막판 결정적인 순간마다 해결사 기질을 발휘, 팀 우승과 함께 하라 감독을 헹가래침으로써 그간의 울분을 한 번에 씻어 보낼 수 있게 됐다.
[Copyright ⓒ 한국 최고의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OSEN(www.ose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