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북 고창군 흥덕면 오호리에서 백제시대의 인장(印章)이 출토되었다. 전북 문화재연구원이 농공단지 조성예정지에서 문화유적을 조사하던 과정이었다. 백제식 돌방무덤(石室)에서 나왔다. 청동제였다. 가로 세로 각 2.5㎝. '○義將軍之印'<사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연구원측은 "6세기 초반 것으로, 백제시대 인장이 출토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백제가 최소한 영산강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이 인장의 발굴로 잠잠했던 백제의 영산강유역 진출 시기를 놓고 학문적인 공방이 재연될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논란이 분분한 것은 사료해석과 증거의 문제로 귀착된다. 문헌을 중시하는 사학계에서는 백제와 관련된 ‘일본서기’ 기록을 중시해왔다. 그 기록이란 이와 같다.

“(신공) 49년 3월 황전별과 녹아벌을 장군으로 삼아 구저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건너가 탁순국에 이르러 장차 신라를 습격하려 했다. 그러나 군사가 적어 신라를 깨뜨릴 수 없다는 의견이 있어, 사백과 개로를 보내 군사의 증원을 요청하니, 즉시 목라근자와 사사노궤에게 명하여 정예군을 거느리고 사백·개로와 함께 가도록 하였다. 모두 탁순에 모여 신라를 쳐 깨뜨렸으니, 이로 인해 비자발·남가라·탁국·안라·다라·탁순·가라 등의 7국을 평정하였다. 그리하여 군대를 서쪽으로 옮겨 고해진을 돌아 남만인 침미다례를 도륙하고 이를 백제에게 주었다.”

▲ 백제시대의 인장이 발견된 전북 고창 흥덕 농공단지 예정지. 백제사 규명에 단서를 제공해주었다.

마치 왜군이 침략의 주체로 서술되어 있으나, 여기서 말하는 왜군은 실제로 백제군사이다. 서기 369년 백제가 왜와 함께 가야지역을 공략하고, 고해진(강진 추정)과 침미다례(해남 추정)을 점령, 영산강유역의 거점을 확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삼국사기’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동성)왕은 탐라가 공납을 바치지 않는다 하여 친히 정벌하여 무진주(武珍州)에 이르렀다.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죄를 비는지라 이에 그만두었다.”

서기 498년 동성왕의 군대가 무진주, 즉 영산강 상류권인 광주지역에까지 미치고 있다. 제주도가 공납을 바치지 않았다는 것으로 미뤄 보면 이미 이 때는 백제가 영산강 유역권을 공물을 받으면서 현지 세력권을 인정하는 방식, 즉 공납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백제가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직접 지배하는 방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주지역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옹관고분과 백제의 중심묘제인 석실이 결합된 형식을 보이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최근 연구의 흐름을 보면, 영산강 유역권의 세력이 백제와는 거리가 먼 독자적인 세력을 6세기초반까지 지속했다는 점을 특히 고고학계에서 강조하는 분위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