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들은 왜 죽음을 무릅쓰고 눈 덮인 에베레스트를 오르려는 걸까? 영국의 전설적인 산악인 조지 맬러리는 “산이 거기 있어서!”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럼 수만 리 바닷길을 헤치고 신대륙을 항로를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에게 물어보자. 왜 바다로 가느냐고. 과연 어떤 답이 돌아올까? 그 또한 맬러리의 화법으로 “바다가 거기 있어서”라고 할까?

이탈리아 출신인 콜럼버스는 일찍이 해도(海圖)만드는 일을 하였다. 그러면서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하면 인도에 다다를 수 있다는 믿음을 굳히게 된다. 그리고 1484년, 포르투갈 왕에게 대서양 탐험 항해를 제안한다. 하지만 당시 인도로 가는 동쪽 항로인 아프리카 희망봉 루트를 준비 중이던 포르투갈 왕은, 콜럼버스의 제안을 거절하고 만다.

그 무렵 콜럼버스의 도박성 제안에 관심을 보인 사람은 에스파냐 이사벨 여왕이었다. 1492년 4월. 콜럼버스는 이사벨 여왕과 ‘산타페협약’을 체결한다. 콜럼버스는 발견한 땅의 총독으로 임명되며 그 땅에서 나오는 재물의 10%를 갖는다는 것이 계약의 골자였다. 이사벨은 선박과 항해자금을 제공하고, 죄수들을 선원으로 모집하는 일도 도왔다. 또한 ‘산타마리아호’의 선주 핀손도 자신의 배를 끌고 함께 참가하였다.

▲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형상지' 1482년판에 실린 세계지도.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는 배 세 척에 선원 120명을 싣고 팔로스 항을 떠난다. 그리고 두 달 뒤에는 드디어 카리브 해의 바하마 제도에 이르렀다. 콜럼버스는 그곳을 인도의 일부라고 여겼다. 그래서 일대의 섬을 ‘서인도 제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히스파니올라 섬을 식민지로 삼은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을 다그치며 황금과 향료가 나는 곳을 탐색한다. 하지만 그해 크리스마스 날 밤에 산타마리아호는 난파당하고 만다. 그 때문에 선주 핀손과 마찰을 빚던 콜럼버스는 무장한 선원 40명을 ‘인디언 사냥꾼’으로 남겨둔 채, 몇 가지 금붙이 따위를 들고 1493년 3월에 귀국한다.

이사벨 여왕은 그를 ‘신세계’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인도에서 황금을 캐왔다는 소문이 돌면서 콜럼버스는 대번에 ‘인기스타’가 되었다. 콜럼버스는 곧 두 번째 선단을 모집한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한탕주의자’들 1500여 명이 모여들었다. 그들을 17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콜럼버스는 다시 대서양을 횡단한다.

신세계의 불청객 콜럼버스 총독은 히스파니올라에 도시를 건설하는 한편, 그곳 토지를 한탕주의자들에게 분양하였다. 그들은 인디언을 포로처럼 부려 밭을 일구고, 금광을 파헤쳤다. 그러나 거기서 나온 금은 그들의 욕망을 채우기에 턱없이 모자랐다. 이 정복자들은 본국에 황금 대신 인디언 노예를 선물로 보냈다. 목이 빠지게 황금을 기다리던 에스파냐의 투자자들은 실망하였다. 1496년에 귀국한 콜럼버스는 결국 문책을 당하였다.

1498년, 콜럼버스는 세 번째 항해를 떠난다. 하지만 히스파니올라에서 반란이 일어나 그는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1502년에도 콜럼버스는 항해를 떠난다. 하지만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겨우 귀국하였다. 더구나 2년 뒤에는 후원자 이사벨마저 죽음으로써 그는 외로운 파산자 신세로 떨어지고, 건강을 잃은 그는 1506년에 눈을 감는다. 그리고 죽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이 발견한 땅이 인도의 서부라고 믿었다.

한편, 신대륙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사람은, 한 때 콜럼버스 밑에서 일하다가, 뒤에 대서양 뱃길의 새 주인공이 된 아메리고 베스푸치였다. 그는 콜럼버스가 발견한 땅이 서인도가 아니라 신대륙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여행기록에 적는다. 그래서 1507년에 독일의 지도 제작자인 발트제뮐러는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신대륙에 새겨 넣었다.

대서양 항로 발견으로 아메리카 대륙은 유럽인들의 약탈지가 되었다. 당시 신대륙에는 마야, 아스텍, 잉카 등 수준 높은 문명이 발달해 있었다. 하지만 1521년에는 코르테스가 아스텍제국을, 1533년에는 피사로가 잉카제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를 고상한 표현으로는 ‘문명의 접촉’이라고 한다. 학술적으로 표현하면 문명의 ‘흡수통합’이고, 실상을 말하자면 ‘무력침략’이다.

산악인들은 에베레스트 꼭대기에 황금은 고사하고 오직 공포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그들은 ‘산이 거기 있어서’ 애써 산에 오른다. 하지만 콜럼버스와 같은 15세기 유럽의 탐험가들은 단지 ‘바다가 거기 있어서’가 아니라, 바다 너머에 있는 황금에 대한 욕망으로 망망한 뱃길에 몸을 던졌다. “당신은 왜 바다에 갑니까?”라는 물음에 대한 콜럼버스의 솔직한 답은 이것이다. “금이 거기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