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랄드 빛 유혹에 취해있던 파리의 뒷골목

지난 세기말의 암울함이 가득한 파리의 뒷골목은 예술가들의 천국이었다. 툴루즈 로트렉이나 아르튀르 랭보 같은 당대의 유명 화가와 문인들은 ‘에메랄드의 유혹, 마법의 술’이라고 불리던 ‘압상트(Absinthe)’에 취한 채 예술을 논했다. 젊은 시절, 파리를 찾은 헤밍웨이도 압상트의 마력에 취했고, 비운의 천재 고흐 또한 몽마르트에서 만난 로트렉의 소개로 압상트를 즐겨 마셨다고 한다. 몇몇 예술가들은 압상트를 그들의 작품 속의 소재로 등장시키기도 했다.

압상트는 중독성이 강한 일종의 환각제다. 압생트에 중독 되면 환각상태에 빠져들게 된다고 한다. 즉 환청과 착시 현상이 나타나면서 흥분과 분노, 공격, 발작 등의 정신적인 혼란을 가져온다. 고흐가 귀를 자른 것이나 자살을 한 것은 이런 압생트에 중독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독으로 인한 정신적 착란, 자살을 유발하는 일종의 마약과 같은 환각제였던 압상트는 아이러니하게도 유럽 근대의 인상파 미술과 자연주의와 상징주의 문학을 낳은 원천이기도 하였다.

▲ 에드가 드가, '압상트, Absinthe', 캔버스에 유채, 92×68 ㎝, 1876,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

고독과 권태로움에 빠져있는 도시인의 모습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에드가 드가(Edgar De Gas, 1834~1917)가 그린 ‘압상트’가 그 중 하나이다. 그의 그림을 보면 당시 파리의 분위기를 잘 알 수 있다. 낮부터 마셨는지 어둠이 깔릴 무렵, 한 쌍의 남녀가 압상트 한 병과 술잔을 놓고는 카페에 나란히 앉아 있다. 파리의 최신 유행을 따른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다. 이미 취해서 눈의 초점이 흐린 여인과 냉담한 표정으로 딴 곳을 응시하고 있는 남자의 시선이 쓸쓸하고 암울해 보인다. 두 사람이 연인 사이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함께 있는 모습이 외롭고 불안해 보인다. 마치 무미건조하고 형식적인 만남에 지친 현대인들처럼 말이다.

드가는 고독한 도시인의 모습을 통해 권태로움과 우울함을 드러내었다. 이렇게 인상파 화가들과 그 후배 예술가들은 점점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갉아먹는데도 압상트 한 잔에 그들의 고독을 위로 받았다. 유명 예술가들의 몇몇은 일종의 마약과 같은 약물에 중독 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극단적인 경우 고흐처럼 자해를 하거나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이 말은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로 유명한 프랑스의 소설가 프랑소와즈 사강(Fran�oise Sagan, 1935~2004)이 마리화나 흡연과 마약복용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 재판정에서 한 말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꽤나 반항적인 아이로 수녀원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기도 했다. 일련의 현대인의 고독을 다룬 작품으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소설가는 당당하게 얘기한다. “남에게 해를 미치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어요.”

예술가들은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싶어한다. 때로는 상식을 넘어선 행동으로 일반인들을 당혹스럽게 하기도 한다. 술과 약물의 중독으로 자신을 파괴해가며 한쪽으로는 창작의 불꽃을 태우기도 한다. 스스로를 파괴하고서 남긴 걸작, 그것은 파우스트 박사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거래한 대가처럼 더욱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들이 그들의 파란만장한 생애 속에서 일탈된 행동으로 하여금 혹시나 ‘예술가들은 역시…’ 하는 선입견으로 더욱 극적인 요소를 기대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독일계 미국인 정신분석학자이며 사회학자였던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은 윤리학의 중요한 대안으로 ‘∼로부터의 자유(소극적 자유)’보다는 ‘∼를 위한 자유(적극적 자유)’의 달성을 강조한다. 프롬의 인간주의적 윤리학의 발전은 개인주의적인 자기 깨달음을 가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 내면에 잠재된 자기 파괴의 충동과 자기 검열 사이에서 고뇌하다 자살을 선택한 그들을 볼 때 과연 그들의 자기 파괴의 권리는 침해할 수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