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 공휴일인 것은 8·15 광복절이 국경일이기 때문이다. 광복절의 취지는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한꺼번에 국가적 경사로 기념하는 것이다. 하지만 국민 대다수가 체감하는 광복절의 의미는 건국보다 해방 쪽에 훨씬 더 무게가 쏠려 있다. 이로써 세계 유수의 문명국가들이 갖고 있는 ‘건국기념일’이 우리나라에서는 사실상 유야무야(有耶無耶)한 셈이다.

물론 지금까지 제헌절이 있어서 어느 정도 보완을 해오긴 했다. 그러나 그것마저 내년부터는 국경일에서 평일의 기념일로 격하된다. 게다가 대한민국 헌법마저 최근 최고권력자에 의해 ‘그놈’이라는 딱지가 붙은 상태다. 하긴 취임식장에서부터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대한민국을 단죄했던 바로 그 대통령 아니던가. 사정이 이럴진대 대한민국 건국의 높고 깊은 뜻은 국민적 관심에서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 13일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에서 열린‘광복 62주년, 이준 열사 순국 100주년 기념 나라사랑 우리는 하나 인간띠 잇기’행사에 참석한 시민들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석촌호수를 감싸는 인간띠를 만들고 있다.

8·15 해방과 8·15 건국은 시간적 연속성과는 달리 인과적으로는 별개다. 해방은 독립국가 출범의 필요조건이었을 뿐 대한민국 탄생의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태동한 대한민국 정부는 일시적 분단을 감수한 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적극적으로 선택한 근대 국민국가였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사회의 근대 이행이라는 시대적 과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제3세계 동년배(同年輩) 국가들에 비해 절대적 혹은 상대적 우위를 구가해 왔다.

그 계기와 비결을 특정한 정변(政變)이나 정권 혹은 정치지도자에게서 찾는 것은 부차적이고 주변적인 일이다. 본질은 어디까지나 근대국가 대한민국의 강력하고도 안정적인 존립과 함께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부단한 신뢰와 신념이었다. 곧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는 국민국가라는 하드웨어에 시장원리라는 소프트웨어가 합쳐진 이념과 제도의 승리였던 것이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권력이동과 정권교체를 초월하여 근대적 기획과제를 비교적 일관되게 추진할 수 있었다.

가령 1948년 건국에서부터 1950년대 말까지 대략 10여 년 동안에는 각종 근대적 제도개혁과 더불어 사회의식의 문명화와 사회구조의 평등화가 진행되었다. 대표적으로 교육 기적이 그랬고 농지 개혁 또한 그랬다. 그 이후 1990년대 후반까지 약 40년은 국가 주도 계획적 산업화를 통한 한국사회의 양적 파이 증대에 주력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얼마 안 가 세계 굴지의 경제대국으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그사이 1980년대에는 정치적 민주화의 숙원도 달성되었고 1990년대는 시민사회의 괄목할 만한 성장도 경험했다. 하지만 여기서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민주적 전환이나 사회조직의 발전 역시 어디까지나 국가의 건재(健在)를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우 민주주의의 견인차로 평가되는 자발적 결사체는 연방국가와 동반 성장했고, 국가가 부실(不實)한 상황에서 시민사회가 과도하게 활성화된 결과는 독일 바이마르 민주주의의 몰락이 웅변하는 바이다. 이런 점에서도 우리는 운이 아직은 좋은 편이다.

물론 지난 세월 대한민국이 성취한 크고 작은 공적이 그 이면의 폐해와 부작용을 결코 덮을 수 없다. 예컨대 1980년 광주의 비극은 대한민국 정부가 존속하는 한 두고두고 아킬레스건(腱)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1998년 전후 총체적 경제위기에 대해서도 국가는 무한 책임을 자청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대한민국이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점은 스스로 분명하다. 오히려 문제는 최근 10년 가까이 광주의 아픔을 넘어, 그리고 IMF의 시련을 딛고 집권한 대안적 ‘진보’ 정권들의 실적과 행보다.

올해로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의 문턱을 12년째 넘지 못하고 있다. 경제 상황이 IMF시대보다 더 악화되어 있는 가운데 사회적 양극화 또한 날로 심화되고 있다. 냉전시대의 불안한, 하지만 길었던 평화 역시 북한의 핵무기 보유 선언에 따라 예측하기 힘든 안보 불안 상황으로 돌변했다. 이런 처지에서 국민의 정부 지지도가 20%대에 고착되어 있다는 사실은 정권이 자초한 당연한 창피이자 대한민국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바로 ‘잃어버린 10년’의 장본인들이 건국을 홀대하고 대한민국을 폄하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적 몰염치에 앞서 ‘제 얼굴에 침 뱉는’ 식의 자기 부정에 가깝다. 행여 외부 세력이라면 모를까, 대한민국의 법통 정부 자격으로 결코 이럴 수 없는 법이다. 그리하여 당장 오늘부터라도 내년의 건국 60주년을 성대한 국가적 축제로 맞이할 카운트다운을 시작해야 한다. 6월 항쟁 혹은 민주화 20년을 기억하려는 노력의 절반, 아니 10분의 1이라도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준비에 할애되어야 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지난 10년은 어떠한 장기 종합 국가계획도 없던 시절이었다. 물론 개발국가, 토목국가, 영토국가 시절의 국가주의로 회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식강국, 문화대국, 통상부국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번영은커녕 생존의 희망마저 보이지 않는 21세기 현시점에서 대한민국은 결코 이대로 멈출 수 없다. 물론 대한민국의 미래 도정(道程)에 통일조국이 빠지겠는가. 하지만 그것 역시 어디까지나 대한민국 국가의 자긍심, 대한민국 국민의 자존심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