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탄생한 한국 공포 영화 중에서, 최고의 작품 2편을 추천한다. 1942년 경성의 서양식 병원에서 벌어진 기이한 이야기‘기담’, 그리고 수술 중 각성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연쇄살인으로 풀어낸 스릴러‘리턴’이다. 하나는 숨이 멎을 것 같은 고혹적인 이미지, 또 하나는 근래에 드문 밀도 높은 시나리오가 매력이다. 깜짝쇼나 잔혹한 비주얼 몇 장면이면 만사형통이라고 믿어왔던 게으른 한국 호러에게 던지는, 후련한 죽비 소리이기도 하다.
1940년대 경성, 모순적 공간서 피어난 고혹적인 비주얼… 기담
붉은 꽃잎이 나선형으로 떨어진다. 추락하는 꽃잎이 내려앉는 지점은 꽁꽁 언 강물. 투명한 얼음 아래로 가녀린 여인의 주검이 보인다. 꽃잎과 빙판이 점과 점으로 만나는 순간, 얼음은 거미줄 같은 문양을 만들어내며 파열한다.
'기담'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친절하지 않다. 하지만 이 기이한 공포영화는 드라마의 불친절함을 기꺼이 감수할 만큼의 기품 있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어떤 공포영화는 구구절절한 스토리보다 비범한 몇 개의 장면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기담'이 그런 경우다. 미닫이 문을 열어젖히며 연인의 사랑과 결혼을 사계절로 표현하는 장면, 유리병 밖으로 기어 나오려는 달팽이 한 마리와 주검에 달라붙은 수십 마리 달팽이를 비교하는 장면 등이 대표적. 익숙한 것의 낯섦, 그리고 쓸쓸함의 정서를 공포로 바꾸는 재능에 있어, '기담'은 탁월하다.
해방 직전의 경성. 세기말적 불안과 쾌락이 공존하던 이 모순적 공간에 세 가지 사랑이 싹튼다. 의대 실습생 정남(진구)과 자살한 여고생 시체와의 사랑, 한쪽 다리를 절고 있는 의사 수인(이동규)과 그의 치료를 받는 아홉 살 소녀환자 아사코(고주연)와의 사랑, 마지막으로 동경유학을 다녀온 엘리트 의사 부부 인영(김보경)과 동원(김태우)의 사랑이다. 당시 희귀한 서양식 병원이었던 안생 병원에서 시작된 이들의 비정상적인 사랑은 균열을 일으키고, 때맞춰 연쇄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이들이 빚어내는 각각의 사랑은, 1940년대의 경성이라는 시공(時空)만큼이나 모순투성이다. 더군다나 비선형적 이야기 얼개를 선택한 탓에, 기승전결에 익숙한 관객으로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두를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 영화가 품은 처연한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이 모든 것을 상쇄할 만큼 매력적이다. 실제 사촌간인 정범식·정식 감독의 공동 연출작. 충무로는 이렇게 또 하나의 재능을 얻었다. 8월 1일 개봉.
기억의 밑바닥까지 들춰낸 밀도높은 시나리오… 리턴
원치 않았던 무언가가 되돌아왔을 때. 당신의 기분은 어떤가.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던 기억일 수도, 절대 두 번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일 수도, 결코 발을 들이고 싶지 않은 장소일 수도 있다. 그 무엇이 됐든, 잠재의식 저 밑바닥으로 꽁꽁 가둬놓았던 검은 그림자가 빗장을 풀고 나올 때, 치명적인 아픔은 스멀스멀 되살아나기 시작할 것이다. 언젠간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 자체가 이미 인간에게 공포가 된다.
영화 ‘리턴’은 그런 기억, 그런 사람, 그런 장소 모두를 담고 있다. ‘수술 중 각성’이란 소재로 은유 됐지만, 인간이라면 하나 둘쯤 품고 있을 법한, 봉인해 버리고픈 것들에 대한 총체적인 시각이 드러난다.
이 영화는 수술 중 겪은 고통이 만들어낸 트라우마로 연쇄 살인범이 된 어린 아이 ‘나상우’가 25년 후 돌아온 뒤 벌어지는 사건들을 큰 줄기로 삼고 있다. 되살아난 기억 때문에 다시 살인을 벌이는 나상우가 대체 누구인지 추적하는 스릴러. 남자 주인공들의 유기적인 관계 설정 부분에서 이 빠진 듯 헐렁한 부분도 눈에 띄고, 관객을 옭아매야 할 초반 전개가 다소 느슨한 면이 없진 않지만, 무엇보다 남자 주인공들의 탄탄한 연기력이 극의 완성도를 한껏 높였다. 드라마 ‘하얀거탑’에서 냉철한 외과 의사로 열연했던 김명민은 여전히 냉철하지만 마음 따뜻한 외과 의사 류재우 역을 맡았다. 의료 사고 때문에 매일 협박에 시달리는 재우는 수술을 앞두고 마취과 동료인 장석호(정유석)와 정신과 의사 오치훈(김태우)과 마찰을 빚는다. 무언가 비밀을 감추고 있는 듯한 김명민의 어릴 적 친구 강욱환(유준상)의 반갑지 않은 등장. 그 이후 재우 주변에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아내 희진(김유미)까지 희생된다. 희진의 죽음을 통해 점점 나상우의 실체는 밝혀지기 시작하고, 차가운 표정 뒤에 숨겨진 뜨거운 악마성의 베일을 벗는다.
1999년 단편영화 ‘절망’으로 호평 받았던 신인 이규만 감독의 장편 데뷔작. 시나리오도 직접 쓴 이 감독은 “한국형 미스터리 스릴러물의 새 장을 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9일 개봉. 청소년 관람 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