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실성왕은 재위 1년(402) 내물왕의 셋째아들 미사흔을 왜국에, 재위 11년(412)에는 미사흔의 형 복호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다. ‘삼국사기’ 박제상열전은 “일찍이 내물왕이 자기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낸 것을 원망하여 그 아들에게 유감을 풀고자 하여 보냈다”라고 실성왕도 한때 고구려의 인질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두 인질의 친형 눌지왕이 즉위 후 두 동생을 그리며 울자 박제상(‘삼국유사’에는 김제상)이 구해온 후 왜국에서 대신 죽은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중국의 유명한 인질은 한(漢)나라의 왕소군(王昭君)과 당 태종 때 티베트 황제에게 시집갔던 문성공주(文成公主)이다. 원제(元帝)의 후궁이었던 왕소군은 공주라고 속이고 흉노 황제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가 아들 하나를 낳고 복주루 선우(復株累單于)에게 재가하여 두 딸을 낳았다고 ‘한서(漢書)’ 흉노열전은 전하고 있다. 내물왕의 아들 눌지가 실성왕을 죽이고 즉위한 것처럼 인질생활은 많은 원한을 낳게 마련이다. 왕소군이 서시(西施)·초선(貂嬋)·양귀비(楊貴妃)와 함께 중국 고대 4대 미녀에 꼽히는 것도 흉노에 인질을 바쳐 평화를 샀던 한족(漢族)들의 한이 응축된 결과일 것이다. 두보(杜甫)가 ‘영회고적(�懷古迹)’에서 “흉노어 비파곡이 지금껏 전해 오는 것은/ 곡 중에 왕소군의 원한이 담겼기 때문(千載琵琶作胡語/分明怨恨曲中論)”이라고 슬퍼한 것처럼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단골 소재이기도 했다.

그러나 왕소군이나 문성공주가 따뜻한 대접을 받았던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인질은 후하게 대하는 것이 관례였다. 인간 본연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기 때문이다. 비무장의 사람들을 인질로 납치해 죽이는 탈레반 같은 흉악무도한 정치세력은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쉽지 않다. 그런 세력에 끌려 다녀야 하는 현실이 답답하기만 하다. 미사흔이 돌아오자 기뻐한 눌지왕은 스스로 노래와 춤을 지었는데, ‘근심이 그친 노래’라는 뜻의 우식곡(憂息曲)이 그것이다. 우리 국민 대다수도 우식곡을 부를 날을 고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