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체벌 동영상 UCC가 떠돈다. 이번은 김해의 한 고등학교가 배경이란다. 전후 맥락을 생략하고 그 동영상만 보자면 모 재벌 회장의 폭력만큼이나 가슴이 울울하다. 논란이 일자 해당 교육청은 교사를 징계하겠다고 발 빠르게 나섰다. 교사한테 불경한 언사를 내뱉은 학생의 잘못은 어느 새 묻혀버렸다. 이래저래 교사의 품위가 말이 아니다.
노련한 선생들이 하는 말이 있다. “(학생을) 때리면 본전도 못 찾는다”. 과연 그럴 것이 학교 체벌의 90% 이상은 학생의 ‘불손한 언행’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이다. 문제학생 ‘홍길동’은 선생이 때리기만을 기다린다. 매일 천덕꾸러기 취급받다가 한 대 맞으면 사건의 중심에서 동정과 응원을 받는 처지로 뒤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덕꾸러기 ‘길동이’는 거리낌없이 ①아무렇게나 행동한다→②교사의 체벌을 유발한다→③학부모가 항의차 방문한다→④교사가 길동이 학생한테 공개적으로 사과한다. 이 ‘굴욕’을 겪은 교사는 물론 지켜본 교사들도 문제의 길동이는 가급적 건드리지 않게 된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이는 ‘자해 공갈단’의 수법과 유사하다. 자연스레 교육은 포기되고, 길동이는 잘못을 교정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무례하고 방자하게 자란다. 그렇게 길동이는 학교를 졸업했고, ‘아무 때나 아무한테나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무뢰한’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사회적 처벌은 선생한테 몇 대 얻어맞고 끝나는 학교처럼 관대하지도 않다. 길동이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사랑으로 가르치라고들 하지만 훈계하는 교사한테 정면으로 “×발” “×까네” “진단서 뗄거야”라고 대드는 학생마저도 한없이 사랑하기는 쉽지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 다급한 상황을 수습하려면 감각의 통증을 자극하는 교육, 체벌이 즉각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런데 웹2.0시대의 총아로 등장한 동영상UCC는 즉시 이 현장을 촬영하여 인터넷에 유포한다. 사건은 종종 왜곡되고, 본질은 잊혀지고, 희생자는 엉뚱한 곳에서 나온다. 시대와 상황이 달라졌으니 이에 걸맞게 교사도 교육의 모습도 변해야 하지 않을까.
우선 교사들이 절대 체벌하지 않는 방법이 있다. 체벌을 엄격히 법으로 금지해버리는 것이다. 학생 인권을 옹호하는 측에서 이런 법안을 마련하고 있는 걸로 안다. 대신 얼마 전 서울시교육청이 제안했다는 교사의 ‘학생 징계권’도 아울러 입법하는 것이다. 양편 모두에게 권리와 의무를 공평히 부과하자는 뜻이다. 여기서 ‘징계권’은 교사가 독자적 판단에 의해 근신, 격리, 나머지공부 등의 벌을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을 말한다. 살벌해 보이지만 이렇게 하는 나라들이 많다. 영국은 최근 강력한 학생처벌법안을 통과시켰고, 진작 이런 법이 있는 미국에서는 그도 모자라 다시 체벌을 허용하고 있는 추세다.
‘교사 때리기’가 대중스포츠처럼 돼버린 세상이니 “교사가 마구 징계를 남발할 게 아니냐!” 반대하는 경우도 있지만 정작 교사들한테 물어보면 아직도 착한 사람들이 많은 곳이 교직임은 분명해서 “징계권이 있다고 누가 그걸 쓰겠어요?” 한다. ‘징계권이 있어도 안 쓴다’면 그야말로 이 법의 이상이 실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나는 학생부 소속이라 일주일에 한번 교문 지도를 한다. 복장 위반자나 지각생들을 모아놓고 적절한 벌을 주는 게 내 임무인데, 솔직히 하기 싫은 일이다. 학교가 정한 규칙이고 내 할 일이니 하는 것뿐이다. 즉 싫어도 해야 하고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일이 있다는 것, 이것을 학생들도 학교에서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다만 몸으로 깨닫게 하는 일이 늘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으니 이쯤에서 ‘문서’로 해보자는 것이다. ‘교사의 체벌을 금지하고, 일반교사에게도 징계권을 부여하라!’ 교육에 딱 맞아떨어지는 정답은 없다. 구체적 현실 속에서 구체적 대안으로 부단히 시행착오를 겪어낼 수밖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