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자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도 몸을 일으켰다. 우리는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아무 말없이 1층까지 내려갔다. 엘리베이터 안을 가득 채운 침묵의 긴장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나는 남자에게 말했다.

“저, 놀라셨겠어요.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남자는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한 눈치였다. 그는 그러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아, 예. 고맙습니다.”

그러나 고마워하는 눈치가 전혀 아니었다. 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 수희씨는 지금 어느 병원에 있나요?”

앞서 걸어가려던 남자가 발걸음을 멈추고 물끄러미 나를 돌아보았다. 경계심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왜요?”

“아니, 그냥. 제가 수희씨 옆방에 있었거든요. 가끔 만나면 인사도 하고 그랬는데……. 갑자기 이런 일을…….”

남자는 조금 망설이다가 더 이상 뭔가를 생각하기도 귀찮았는지 내뱉듯이 말했다.

“119가 세브란스에 데려다 놨더라구요.”

서울말을 쓰고는 있었지만 희미하게 남쪽 억양이 남아 있었다. 그 억양이 다시 한 번 옆방녀를 연상시켰다. 둘의 말투가 정말 비슷했다. 당연하지. 오랜 연인이었으니. 가슴 한구석이 정말 송곳으로 후벼파듯 아팠다. 나는 오른손으로 그 부위를 지그시 눌렀다. 아베크롬비는 발을 떼려다가 다시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오지 마세요, 괜히……. 호상도 아니고.”

그러고는 버스 정류장 쪽으로 단호하게 몸을 돌렸다.

“저기요.”

나는 그를 불러 세웠다.

“혹시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남자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누구요? 저요? 왜요?”

“아니, 그냥.”

▲ 그림=이우일

남자가 의혹에 가득찬 눈길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이유를 생각해낸 듯 비웃음기가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혹시 수희한테 돈 꿔 주셨어요?”

나는 화들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럼 뭐예요?”

“아니, 그게……. 혹시 영안실에 갔을 때 못 찾거나 하면…….”

“오지 마시라니까요.”

별 실없는……. 남자는 혼잣말을 내뱉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찬란한 햇살이 부서지는 고시원 건물 입구에 멍하니 서서 젊은 우체부가 제 몸을 이끌고 한 걸음 걸음 내딛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까 형사와 다투다 어디를 다쳤는지 다리를 살짝 절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아무 걱정 없는 얼굴로 그와 내 곁을 지나갔다. 나는 트렁크를 끌고 그와는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트렁크는 무겁고 거추장스러웠다. 마치 트렁크 속에 옆방녀의 시체라도 들어 있는 기분이었다. 어디다 휙 던져버리고 그것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었다. 바퀴가 어딘가에 걸려 트렁크가 기우뚱 기울어질 때마다, 그래서 발걸음을 멈추고 트렁크를 돌아보게 될 때마다, 트렁크 속의 옆방녀가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너는 내가 죽기를 바랐지? 그렇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계속 걸었다.

아니, 아니야. 제발 나를 용서해 줘.

트렁크의 바퀴가 마지막으로 보도블록 사이에 끼인 곳은 산울림 소극장 근처의 다리 앞이었다. 나는 낑낑거리며 트렁크를 빼냈다. 그리곤 그것을 끌고 다리 위로 올라가 다리 난간 위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힘을 주어 그것을 난간 바깥 쪽으로 밀었다. 그러나 내 온갖 살림살이가 다 들어있는 트렁크는, 내 모든 옷가지와 MP3플레이어와 필기구와 몇 권의 책을 담은 그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트렁크는 쉽게 난간을 넘어가지 않았다. 마치 살아있는 어떤 짐승을 절벽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떨어질 것은 결국 떨어지게 마련이다. 내 손을 떠난 트렁크는 자유낙하를 하다 쿵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나는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버려진 트렁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때 철길이었던 그곳은 이제 공사장이 되어 있었다. 철로를 걷어내고 공원을 만든다는 얘기를 들은 것도 같았다. 나는 텅 빈 눈으로 길고 황량한 공사장을 한없이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