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과 함께 떠나는 여행길, 그 가방 속에
“너와 함께라면 세상끝까지라도 간다”고 맹세하는 독자여, 이 소설을 읽고 그 맹세를 수정하시길….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기발한 발상이 빛나는 신작 장편 ‘파피용’(열린책들)의 주인공은 사랑하는 이와 함께 우주 끝까지 날아간다. 우주과학자 이브 크라메는 요트 선수 엘리자베트 말로리를 승용차로 쳐서 다리를 못쓰게 만든다. 인생이 끝장났다고 생각하는 그녀를 구원하기 위해 우주비행선을 만들고, 항로를 잡을 키잡이로 그녀를 끌어들인다. 빛을 동력으로 하는 우주 범선은 태양광을 가득 안고서 시속 200만㎞의 속도로 1000년 우주여행을 떠난다. ‘개미’처럼 공상과학 소설이면서 철학 소설로도 읽히는 것이 베르베르 작품의 매력이다. 환경오염으로 피폐해진 지구를 떠나 노아의 방주처럼 우주를 항해하는 범선 속에서 갈등과 화해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가족, 사랑일까 짐일까?
이 여름, 소설의 진경을 맛보고 싶은 독자에게 은희경 소설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창비)를 권한다. 수록작 가운데 소설집 제목과 같은 단편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한 집에 살지 않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다. 보티첼리의 비너스 그림이 걸린 고급 식당. 아버지와 아들이 식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어쩐 일인지 부자는 정답지 않다. 아버지는 멋진 바바리코트를 벗어 웨이터에게 주고, 아들은 군데군데 솜이 뭉친 낡은 파카를 벗는다. 그들이 식사하던 날, 밖에는 때늦은 봄눈이 내렸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여인의 몸을 빌어 태어난 뚱뚱한 사내가 아버지 앞에 다시 서기 위해 서른 다섯 생일을 맞아 다이어트를 시작한다. 생체의 시스템에서 불합리한 것은 더 이상의 영양공급이 필요 없는데도 식욕을 발동시키는 공복감만이 아니다. 혈육간의 설명할 수 없는 집착이 억제할 수 없는 식욕만큼이나 징그럽게 도드라진다.
역사 소설 붐을 이끄는 쌍두마차
'남한산성'(학고재)을 쓴 김훈과 '리진'(문학동네)을 쓴 신경숙은 여름 출판 시장에서 가장 빛나는 쌍둥이 별이다. 두 장편 소설은 모두 10만부 이상씩 팔려 나가며 우리 문학의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남한산성'은 단정적인 힘과 곡선의 유려함이 함께 하는 김훈 소설의 독특한 문체미학을 맛볼 수 있다. "임금이 있어야 백성이 있다"며 청과의 전쟁을 주장하는 김상헌과 "백성이 있고서야 임금도 있다"며 화친론을 펼치는 최명길의 논쟁 묘사는 하도 치열하고 신랄해 독자가 헤쳐나가기 힘든 부분이다. "삶의 구체성은 이념이나 관념보다 우선한다"는 작가의 세계관이 담긴 작품이다. '리진'은 신경숙 소설의 트레이드 마크인 인간 내면의 섬세한 묘사에 매료돼 왔던 독자들을 또다시 자석처럼 끌어당긴다. 국운이 시들어가던 시기를 살다 간 소설 속 여인 리진은 사랑하는 남자의 나라 프랑스와 어머니처럼 따르던 명성황후가 있는 나라 조선 사이에서 몽유병 환자처럼 배회한다. 역사소설이지만 여성의 실존적 고민을 다룬 현대소설로 읽히는 것도 이 작품의 매력이다. 사랑을 읽고 싶되 경박한 통속은 거부하는 독자를 위한 최고의 추천작이다.
그냥 편안하게 누워서…
'한국 소설은 너무 진지해'라고 생각하는 독자들, 젊은 작가 이기호가 지난해 가을 선보인 소설집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문학동네)를 읽고 오해를 푸시라. '최순덕 성령 충만기'라는 소설로 성석제를 잇는 유쾌한 웃음의 문학을 펼쳐 보였던 이기호는 이 소설집에서 기발하고 해학이 넘치는 그만의 문학세계를 다시 펼쳐 보였다. 첫번째 수록작 '나쁜 소설'은 "독자의 즐거움을 위해 소설을 쓰겠다"고 말하는 이 작가의 소설관이 드러난 작품이자 발상과 결말의 기발함에 무릎을 치게 하는 단편. 화자가 청자(또는 이 책의 독자)에게 최면을 걸고 최면에 걸린 청자가 여관방 침대에 누워 변태 취급을 당해가며 매춘부에게 소설을 읽어준다. 진지하지도 무겁지도 않게! 그러면서도 안이함으로 흐르지 않기 위해 이 작가가 기울였을 노력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