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을 텔레비전 개그 쇼에서 희화화되는 유명 인물로만 알고 있다면 당신은 아직 우리 사회의 변화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중이다. 그는 자기 이름을 브랜드로 관련 상품의 연간 매출을 1000억 원까지 끌어올린 사업가이며, 연간 20회 넘는 국내외 패션쇼를 펼쳐내는 엔터테이너다.

특허청에 등록된 '앙드레 김' 상표가 17건. 이 가운데 실제 디자인 라이선스 계약을 맺어 시중에 나와있는 상품만도 아파트와 냉장고, 에어컨, 신용카드, 침구, 속옷, 어린이 옷 등 10가지에 이른다. 연간 20회 가까운 패션쇼 스케줄은 일반 패션 디자이너로서는 이해가 안 가는 일이다. 그러나 그의 패션쇼는 옷을 보여주고 옷을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앙드레 김'이라는 브랜드 파워와 이미지를 파는 자리다.

앙드레 김은 12일 중국 우시(無錫)에서 '한중수교 15주년 기념' 패션쇼를 가졌다. 11일부터 사흘간 이어진 한류축제의 주요 행사였다. 스타가수 아이비가 패션쇼 피날레를 장식했다. 그렇게 대중문화 산업과 패션, 그리고 스타 마케팅을 하나로 버무린 것이 앙드레 김 패션쇼다.

그를 신사동 '앙드레 김 아뜨리에'에서 만났다. 장마와 무더위로 후끈한 바깥세상과는 전혀 다른, 별천지가 펼쳐져 있었다. 흰 눈과 얼음, 크리스털의 북국(北國)이다. 크리스털 촛대와 샹들리에, 그리고 눈꽃이 내려앉은 나뭇가지와 유리 사슴, 유리 상록수. 두 손을 모아 합장하듯 인사를 마친 그는 하얀 나뭇가지로 꾸민 샹들리에를 가리키며 "이건 내가 나무를 애딩(adding)해서(더해서) 환상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왜 이렇게 쇼를 많이 합니까? 비용도 적잖게 들 텐데요.

“요청을 많이들 하셔 주셔요. 얼마나 의미 있고 뜻이 깊은 행사냐, 국가적인 문화적 행사냐, 그런 걸 보고 정해요. 제 쇼는 다음 시즌 상품 안내가 아니라 오페라를 보듯, 쇼를 보듯, 패션과 음악을 예술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문화 공연이에요. 국내 쇼도 주최자가 음향 조명 모델료 등 경비를 부담해서 하는 게 많고요. 외국서 할 때는 항공료, 식사, 모든 비용을 대는 조건으로 해요. 절대 자존심을 지키죠.”

느릿느릿 이어지는 말씨에 독학으로 익힌 영어, 뚜렷한 서울 사투리는 개그맨들이 성대모사로 희화할 정도로 독특하다. ‘엘레가앙~스하고, �타스틱하며, 뷰티풀하다’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섞여드는 영어 단어 때문에 우리말 오염의 주범으로 뽑히기도 했지만, 그 자신은 ‘악스퍼드(Oxford) 악센트’라고 자부한다. ‘~~하셔 주신다’는 표현은 그 부자연스러움으로 인해 더욱 ‘튀게’ 느껴지지만, 그는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오래 생각하고 말한다. 깍지 낀 두 손을 보니 길쭉길쭉하고 커다란 손가락이 인상적이다. 올해 일흔 둘. 손등과 손가락의 검버섯을 흰 옷 소매로 덮었다.

―디자이너 앙드레 김의 대중적 인기와 패션 디자인 성과에 대한 평은 많이 엇갈립니다. 황금색 사슴뿔 문양이나, 당초무늬 아플리케(바탕 천 위에 다른 천이나 레이스, 가죽 따위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오려 붙이고 그 둘레를 실로 꿰매는 수예), 아래쪽으로 활짝 퍼지는 드레스, 수십 년 간 똑같다는 거죠.

“어떻게 똑같을 수가 있어요? 똑같은 작품이란 건 없어요. 붓질이 똑같다고 고흐 그림들이 다 똑같은가요? 공통점일 뿐이죠. 저는 급급하게 츄렌드(trend)에 따라 가지 않아요. 환상적이고 동화적인 세계를 옷으로 만들어낸다는 점에서는 언제나 변치 않아요.”

―앙드레 김 이름으로 나오는 아파트와 냉장고, 에어컨에서 아이들 옷까지 디자인 라이선스가 많습니다. 큰돈을 벌고 있겠습니다.

“경제적으로 감사해졌죠. 내가 ‘오뛰꾸티어’(오트쿠튀르·Haute Couture·맞춤복)만하니까 전국의 여러분이 거리감과 아쉬움 느끼시는 것 같아요. 내가 하는 이 패션은 언젠가는 ‘프레타 포르테’(기성복)도 생각하지만, 아직은 먼 일이에요. 지금 란제리 이런 거처럼 대중화한 아이템, 여러분들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을 찾아낸 거죠.”

자기 이름만으로 돈이 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2002년 이후 특허청에 개인 이름으로 특허 출원된 상표는 2천160건. 가장 많은 사람은 42건을 등록한 한경희(스팀 청소기로 이름난). ‘앙드레 김’은 17건을 출원했다. 돈은 얼마쯤 벌었을까. TV홈쇼핑을 통해 출시된 속옷 브랜드 ‘엔카르타’는 2005년 190억 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앙드레 김은 여기서 일정 몫의 로열티를 가져간다. 지난해 삼성전자가 ‘앙드레 김’ 이름으로 내놓은 냉장고와 에어컨은 전체 판매량의 30% 정도를 차지했다. 그래서 얼마나 벌게 되었는지, 얼마나 벌면 ‘감사한’ 건지, 몇 번을 노골적으로, 혹은 에둘러 물어도 그는 짐짓 못 들은 척이다.

“좌우간 지금 현실에 제가 지금 계약하고 예우 받는데 감사하고 있어요. 지난해 12월 제게 10억짜리 CF가 들어왔어요. 그런데 고금리로 문제 많은 사설 금융이었어요. 10억이 물론 적은 돈은 아니죠. 그러나 저의 ‘이메이지’(이미지) 관리도 그렇고 사금융에 대해서도 그렇고….”

―라이선스 상품은 일일이 디자인을 다 하시나요?

“아이템마다 내 분위기, 내용을 제공하고 거기서 고맙게 아름다운 디자인을 만들어 보내면 제가 최종적으로 결정해요. 마지막 사인을 합니다.”

그는 수십 년을 ‘소문과 풍문의 벽’ 안에서 살아왔다. 오랫동안 유일무이한 남성 패션 디자이너였고 화장하는 남자였다. 결혼도 않고 아들을 입양해 키웠다. 미소년들을 무대에 세우는 것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모두가 그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의 속내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주한 외교 사절들과 가장 잘 통하는 민간외교관이며 클래식 음악회와 전시회장의 1등 관객이라는 점도 독특하게 눈길을 끌었다. 그런 그가 대중 앞에 등장한 것은 엉뚱하게도 정치 스캔들의 와중이다. 1999년 김대중 정부 때 일어난 옷 로비 사건 청문회에 그가 증인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막연한 반감이 대중적 인기와 호감으로 변하는 ‘인생역전’이 시작됐다.

―옷 로비 사건 청문회 때 ‘구파발의 김봉남’으로 유명인사가 되셨습니다.

“그때 저에게 전국에 계신 여러분이 관심 가져 주신 것에 놀랐고요. 우리 사는데 진실, 정직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 어떤 억울한 일이 부닥쳐도 정직과 진실이 많은 사랑 받게 된다는 것을 터득하게 됐어요. 패션을 전혀 모르는 분들도 격려해주셨어요. 억울하고 분하고 불쾌했는데 놀랍게도 그때부터 계약이 들어왔어요. 제가 우리나라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 중에 유일하게 제 빌딩이 없었는데, 그때 계약이 들어와서 감사하게도 이 빌딩을 샀어요.”

그는 한국 패션업계에서 철저한 아웃사이더다. 45년 동안 패션 디자이너로 일했지만 다른 디자이너들과 협회나 모임을 같이 하지 않는다. “패션계 분들과 왕래는 안 해요. 패션 디자이너들에게서 배울 게 없어요. 나는 독창적인 세계로 이끌어가기 때문에 교류가 필요 없어요.” 80년대 디자이너들이 명동을 떠나 청담동으로 대거 진출할 때, 한국의 이름난 디자이너 중 강남에 땅 한 평 없는 사람은 앙드레 김과 이신우 밖에 없다고 했을 정도다. 그는 다른 디자이너들과 패션 컬렉션도 함께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저마다 앞다퉈 들어가는 백화점 매장 하나 없다. “간섭받는 게 짜증난다”는 이유에서다.

―청문회 때 뭐가 억울하고 분했습니까.

“옷 한 벌에 2300만원? 실제 그때 IMF 뒤라 옷값을 30%까지 할인해드렸어요. 블라우스 포함 120만원이었는데 검찰에서 믿어주질 않아요. 저는 상식적으로 정직하게 말씀 드렸어요. 국회의원들이 제 의상실에 와서 2300만 원짜리 옷 이야기를 하길래, ‘어디 그런 골 빈 사모님이 계시느냐’고 했어요. 지금도 베라 왕(Vera Wang) 드레스가 1500만원이니 3000만원이니 연예지들이 자랑스럽게 쓰는데, 친칠라 코트도 아니고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패션은 사치가 아녜요.”

▲ 사시사철 흰 옷만 입는 앙드레 김은 작업실도 역시 온통 흰색으로 꾸몄다. 평범한 샹들리에에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흰 눈쌓인 나무가지를‘애딩(adding)’해서 그만의 분위기를 강조했다.

―아들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네, 아기가 생긴 뒤로 저의 인생은 정말 정말 행복했어요. 세상 모든 엄마들, 모든 부모들의 마음을 저는 다 알게 되었어요.” 그는 1982년 생후 5개월 된 남자아이를 입양해 키웠다. 입양사실은 다섯 살 때 알려줬다. 한국외대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아들은 스물두살에 ‘앙드레 김 아뜨리에’의 디자이너와 결혼해 2년 전 쌍둥이를 낳았고, 지금은 공익 근무 중이다. “논산 훈련소 갈 때 저도 따라 갔어요. 훈련 적응 잘하기 바라고 아침마다 기도도 드렸어요. 나이 들어 갔는데 사격도 잘하고 굉장히 모범적으로 잘 끝냈어요.” 아들 이야기가 나오니 신이 난다. “더 기쁜 일이 있어요. 지금 5개월, 또 손자를 익스펙팅(expecting)하고(기다리고) 있어요!” 아들 이야기에서 갑자기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이야기로 옮겨갔다.

"그분이, 방법은 옳지 않았지만. 아빠로서 분하셨을 건 정말 동감해요. 그분 자신도 후회하시겠지만, 보복은 큰 불행을 낳는다는 걸 전국적으로 큰 교훈으로 남겨주셨어요. 우리 아기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학교에서 맞고 왔어요. '아빠, 이가 흔들흔들해요' 그래요. 3학년 형이 그렇게 때린대요. 제가 다음날 스쿨버스에 잠깐 탔어요. 맞은 사람 손들어보라 했더니 7명이 손들어요. 그 길로 학교까지 따라가서 교장, 교감 선생님에게 강력하게 항의했죠. 지금 학교 폭력에 대해 저 나름으로 생각이 있어요. 학교 폭력이 일어나면 교장 교감 문책하는데 그게 잘못이에요. 그 문제를 끝까지 파헤쳐서 학교에서 안되면 법적으로 해결하도록 하고 그걸 표창해야죠."

디자인에서 사회로 주제가 바뀌면서 말이 빨라진다. 표현도 훨씬 직설적이 된다.

"저 요즘 텔레비전 너무너무 불만 많아요. 저번에 김수현씨 드라마는 너무 나빠요. 신문에서도 김희애씨 칭찬을 너무 많이 해요. 김희애(가 맡은 역할)는 가정 파괴범이에요. 미안해서 쩔쩔매야 하는데 너무 약 올리고 못되게 굴어요. 가정파괴범을 그렇게 미화시키면 어떻게 합니까. 맨 끝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김희애가 비행기 타고 가면서 우는 걸 보여줘요. 울 것 같으면 가질 말아야지!(여기서 약간 샐쭉했다.) 이게 뭐예요. 김수현 선생님이 인생관이 바뀌었나 봐요. 카르멘적인, 창녀 같은 인생을 미화해요, 남의 남편을 유혹하고 그런 걸 세련되었다고 칭찬하고, 성실하게 남편 바라고 사는 사람은 바보 취급해요. 작가가 나빠요. 도덕적, 정서적, 교훈적이지 않아요."

―사람들이 도덕적인 드라마를 좋아하겠습니까? 좀 자극적이고 색다른 이야기라야 들여다 보죠.

"도덕적인 게 지루하다고요? 제가 PD랑 작가랑 방송국 사장님에게 묻고 싶어요. 자기 며느리, 자기 사위 볼 때 막돼먹은 집 딸 데려오고 싶어요? 제멋대로인 사위보고 싶어요? 할리우드는 결말이 도덕적으로 돼도 이야기가 참 흥미 있고 재미있어요. 우리 텔레비전이 사명감을 가지고 그런 좋은 이야기를 찾아주셔야 되요."

텔레비전 드라마를 비판하던 그의 예봉이 뮤지컬 무대로 옮겨간다.

"지금 한국에서 하는 뮤지컬은 너무 문제가 많아요. 브로드웨이(그는 '브로즈웨이'라고 했다) 걸 갖다가 영 이상하게 만들어요. 저는 '왕과 나'를 너무너무 좋아했어요. 옛날에 브로드웨이에서 율 브린너 나오는 '왕과 나'부터 최근 것까지 모두 세트가 너무 훌륭하고, 그 자체가 마치 건축 같고 조각 같아서 너무 익사이팅 하게 좋아했어요. 그런데 우리 국립극장에서 '왕과 나' 전반부만 보고 나와버렸어요. 세트가 전부 디지털 프린트에 무용도 형편없어요. 사기당했다고 생각해요. '맘마미아'도 브로드웨이에서 보고 박해미가 나온 우리 거 봤는데,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브로드웨이는 그렇게 관능적이고 광란하는 분위기가 아니에요. 박해미는 극성스럽고 요란스런 게 너무 싫었어요. 사람들을 정서적으로 들뜨고 흥분하게 만들어요. 좋은 음악회나 공연 보면 저 자신이 교양으로 고양되는 기쁨이 있는데, 우리 뮤지컬 공연은 요란하기만 하고 세트나 무용이나 너무 안 좋아요."

―왜 패션 디자이너 되었습니까.

"어릴 때부터 옷을 좋아했어요. 족두리 쓰고 활옷(혼례 때 입는 소매가 넓은 한복) 입은 신부가 연지곤지 찍은 것 보고 정말 아름답다고 느꼈어요. 저는 우리 옛날이 참 아름답고 깨끗했다고 기억해요. 일제 때, 6.25 직후에, 제가 살던 시골에서는 그렇게 가난한데도 새색시는 1년 동안 새 옷을 입었어요. 연분홍 치마에 노랑 저고리 입고, 또 남치마에 연두저고리. 마을 우물에 가면 항상 아름다운 옷차림으로 나와서 그릇을 닦고 물을 담아가곤 했어요. 경제적으로 어려웠어도 항상 단정하고 깔끔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죠. 부뚜막은 늘 반질반질 닦여있었고, 어머니는 마루를 윤나게 닦았어요. 요즘 잘사는 사람들이 지저분하게 해놓고 사는 것 보면 짜증이 나요. 가난해도 우리 음식이며 옷이며 살림은 깔끔하고 문화적이었어요. 우리는 문화적 수준이 있는 민족이에요."

―디자이너는 고객들과 함께 나이 들어 갑니다. 은퇴를 생각해본 일이 있습니까? 평생 아름다운 여인들과 멋진 남성들을 만나고 살아왔는데, 누가 가장 아름다운가요.

"지금으로서는 전혀 생각하고 싶지가 않아요. 저는 손님들을 카운팅(counting) 해 본 적이 없어요. 정의숙 총장님, 윤후정 총장님이 오시는데, 아주 품위 있고 클라식(클래식)하고 심플하게 옷을 소화하세요. 두 분이 인격적으로 아주 아주 훌륭하시고요. 조수미는 '클라식 씽거'(클래식 싱어)로서 다양한 분위기가 있죠. 소녀 같으면서도 성스럽고, 요염하고. 옛날 여배우 중에는 김지미씨가 아주 세련되게 옷 입고요. 최은희씨는 프로 정신이 대단했어요. 엄앵란씨, 문희씨가 지적인 이미지로 제 옷을 소화해주셨고요, 요즘 배우들 중에는 이영애씨, 최지우씨, 김태희씨, 김희선씨가 참 아름답지요? 남자 배우들 중에는 장동건씨, 권상우씨, 송승헌씨, 원빈씨가 의상을 아주 지적으로 잘 살려줘요. 저는 섹시한 이미지가 싫어요. 그래서, 김혜수씨가 참 착하고 머리도 좋은 분이지만, 그분을 생각하면 가슴과 허벅지밖에 안 떠올라요. 섹시하게만 옷을 입으려는 게 품격이 없어서 아까워요."

―평생을 아름다운 여성과 멋진 남성들에 둘러싸여 살아왔는데, 정작 결혼은 안 했습니다.

"일 그리고 주위 모든 사람들에 대한 사랑…. 세월이 흐른 다음에는 아기에 대한 사랑으로 살았어요. 결혼을 했으면 전 아주 좋은 남편이 됐을 거예요. 충실하고 성실하고 진실한…." 두 시간 반 넘게 그를 마주하고 앉아있는 동안 그는 정직, 성실, 두 단어를 스무 번도 넘게 말했다.

"1951년 부산으로 피난 가서 아름다운 송도 해변에 살았어요. 거기서 착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여자 분을 만나서 데이트를 했지요. 프라토닉(플라토닉)한 사랑이었어요. 그리고 서울로 왔는데, 모델로 일하고 패션 공부를 하니 주변에 아름다운 여성들이 많았죠. 일반 학생으로서의 여성, 문화예술계 여성, 모든 분들에게 나는, 따뜻한 여러분들과의 유대는 가졌지만, 사랑한다거나 사랑했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어요."

―왜 사랑을 못했나요?

"저는 일을 너무 좋아했어요. 지금도 저는 토요일에도 일하고 일요일에도 일해요. 시간이 아깝거든요. 명절에는 일을 못 하는 게 싫어서 외국에 가기도 했어요."

―여자보다 남자를 더 좋아하셨던 건가요?

"아니요, 저는 여자 친구들이 더 많아요.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개방되고 그랬어도, 주위를 따뜻하게 하는 미덕, 교양, 지성이 있고 내적인 인격 조화가 있는 여성들이 좋아요."

▲ 인터뷰=박선이 여성전문기자

―지금은 누구랑 살고 있나요?

“3년 전에 아들이 결혼해서 분가하기 전까지는 아들과 살았어요. 아들네 집이랑 같은 단지에 있는 아파트에서 가정부 할머니와 둘이 살고 있어요.”

―화장은 직접 하시나요?

“물론이죠. 간단하게 베이직 크림과 파운데이션, 파우더를 바르고요, 눈 화장도 조금 합니다. 머리카락은 컬러링해요. 세수하면 지워지니까 매일 하지요.”

그가 움직이면 여전히 뉴스가 된다. 지난해 그가 동네 김밥 가게를 찾은 것이 핸드폰으로 사진 찍혔을 때 네티즌들은 그를 ‘완소남(완전 소중한 남자)’이라 부르며 “너무 귀여우시다”고 친근감을 표했다. 그를 둘러싼 신화와 풍문은 그렇게 점차 옅어지고, 그에 대한 호기심과 근거 모를 혐오가 희박해지고 있다. ‘환상 속의 패션 디자이너’에서 사업가로 변신하고 있는 앙드레 김의 존재는 우리 사회의 다양성과 개방성 정도를 재는 바로미터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