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는 즉위교서에서 “지금부터 서울과 지방의 형(刑)을 판결하는 관원은 공사(公私) 범죄에 대해 ‘대명률(大明律)’에 의거해 처벌하라”고 명했다. 이에 따라 조선은 ‘경제육전’ 등에 해당 법조문이 없을 경우 명나라 형법인 ‘대명률’에 의거해 처벌해 왔다.
‘대명률’ 중에 조선 실정에 맞지 않는 부분을 수정해서 번역한 것이 ‘대명률 직해’인데 이두로 번역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두는 각 관아 중인들의 직역인 서리나 아전들이 사용하던 언어였다. 이는 조선에서 실제로 판사 역할을 한 인물들은 형조나 의금부의 서리나 아전이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형조판서는 이들이 해당 범죄에 대한 ‘대명률’ 조항을 조사해 보고하면 이를 국왕에게 아뢰어 윤허 받는 데 지나지 않았다. 서리나 아전들이 판결하다 보니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같은 범죄에는 유사한 처벌이 행해져야 한다는 양형기준제가 일찍이 실시되었던 셈이다.
‘대명률’에도 해당 조항이 없을 경우 비부(比附)했는데, 비부는 정확한 법조문이 없을 경우 그에 가까운 법조문을 적용하는 것이다. 세종 때 군사들이 거리에서 말을 몰다 사람이 상하는 경우가 많았음에도 불구, 처벌 조항이 없었다. 이때 “거리·시장·진(鎭)·상가〔街市鎭店〕에서 수레나 말을 달리다가 사람을 다치게 한 자는 ‘대명률’의 싸우다가 사람을 상하게 한 것보다 한 등(等)을 감하여 처단하고, 사람의 목숨을 상하게 한 자는 삼천 리 밖 귀양”(‘세종실록’ 7년 4월 4일)으로 처벌한 것이 비부의 한 사례이다. 해당 법조문보다 과중하게 판결하는 것이 실입(失入)이고, 가볍게 판결하는 것이 실출(失出)로서 담당자는 모두 처벌 대상이 되었다. 조선이 법조인들의 재량권을 거의 인정하지 않은 것은 법을 사회정의 실현의 도구로 여겼기 때문이다.
로스쿨법이 몇 년째 진통을 겪은 핵심 원인은 일부 법조인들의 사익보호 추구에 있다. 법 제정이나 적용이 일부 법조인이나 유력자들의 이익에 휘둘리는 한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계속 국민들의 상식이 될 것이고 법을 통한 우리 사회의 통합은 요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