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학교 성적표를 보면, 김종훈이가 ‘솔직담백하다’고 돼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선 그렇지 못했습니다. 협상하느라고 그 솔직담백함이 많이 훼손됐습니다.”
6월 30일 워싱턴에서 한미 FTA 서명식이 끝난 후, 우리 측 김종훈 협상 수석대표가 털어놓은 말이다. 김 대표는 워싱턴 특파원들과 만나 “협상하다 보니, 별수 없었다. 1년 내내 솔직담백하지 못했다. 협상에선 전략, 전술이 우선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99년부터 외교통상부를 취재하면서 김 대표를 지켜봐 온 기자에게 그의 고백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평소에도 경상도 사투리가 툭툭 튀어나오는 김 대표는 외교부에서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외교관으로 손꼽혔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평가할 때면 “젊마(저녀석), 순 엉터리데이”라고 외교적 수사(修辭)를 생략한 채 말하곤 했다. 그래서 지난해 그가 수석협상대표로 발탁됐을 때 기자는 고개를 갸웃거린 적도 있었다.
그의 고백은 엄청난 국가이익이 달린 국가 간 협상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목적 달성을 위해 ‘마키아벨리적인 인간’으로 변모할 필요도 있음을 가르쳐준다. 때론 진실도 숨겨야 하는 냉혹한 협상 현장의 이면(裏面)을 보여준 셈이다.
김 대표는 FTA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언론을 적절히 활용했음을 시사하는 발언도 했다. “미국으로부터 추가협상 요청을 받고, 관련 부처와 협의 후 본질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요구가 별것이 아니라고 하면, 그 대가로 우리가 아무것도 요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언론에 대고) 힘든 부분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김 대표에 앞서 한미 FTA 서명식에서 연설을 한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의 발언도 흘려 들을 수 없었다. “태평양 건너편(미국)에도 한미 FTA의 이익이 클 것입니다. 한미 FTA는 미국산업, 서비스, 그리고 농업분야에서 많은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미국 기업들이 역동적인 지역에서 우리와 함께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할 것입니다.”
이번 협상 결과가 미국에도 유리한 부분이 있다는 김 본부장의 발언은 미국 측 참석자를 의식한 ‘립 서비스’측면도 있지만, 100% 진실을 담고 있다. 제대로 된 국가 간의 협상에서는 일방적으로 한쪽이 압승하거나 참패하는 협상 결과가 나올 수 없음을 시사했다고 볼 수 있다.
한미 FTA 협상결과에 대해선 평가가 엇갈리지만, 우리나라가 미국에 10 대 0으로 이기거나, 미국에 9 대 1로 지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양국 정부가 판단하기에 적절한 수준에서 이익의 균형점이 찾아졌기에 최종 서명을 한 것이다.
한 고참 외교관은 “정상적인 시스템이 작동하는 나라들끼리의 협상에서는 대개 5 대 5나 5.5 대 4.5의 협상결과가 나오게 돼 있다”고 말했다.
모든 협상절차를 마치고, 한미 양국의 의회로 공이 넘겨진 한미 FTA는 ‘협상학(協商學)’ 측면에서 여러 가지 복기(復棋)할 요소를 많이 남겼다. 협상 중인 우리 측 대표의 공식 발언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결과를 놓고 “우리가 완승(完勝)했다”, “미국의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식의 극단적 평가를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번 협상과정을 다시 점검하면서 정부 차원에서는 협상기술의 선진화가 이뤄지고, 민간에서는 통상 협상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자리잡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