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로 나와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자꾸만 그 사람이 죽었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왜?”
“그런 방정맞은 생각이 들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그런 생각이 들어.”
그녀가 내 손을 꼭 잡아왔다. 나는 힘을 주어 그 손을 잡았다. “첫째, 그 사람의 오토바이가 발견됐을 뿐이야. 죽었다고 단정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어.”
“그렇겠지?”
그녀의 표정이 아주 조금 밝아졌다.
“둘째, 그 사람이 죽었든 안 죽었든 그건 지원이 너하고 아무 관계 없는 일이야. 그건 그 사람 문제야.”
그녀가 고개를 떨궜다.
“내가 사람 세워 놓고 늦게 내려갔거든. 그게 그 사람 내부의 뭔가를 건드린 게 아닐까?”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야.”
그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기분을 돌리기 위해 밝은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이춘성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사실은 나 재밌는 일이 하나 있었어.”
“뭔데?” 그녀가 희미하게 흥미를 보였다.
“나 퀴즈쇼 녹화하던 날 기억나?”
“물론이지.”
“그날 녹화 끝나고 스튜디오에서 나오는데 어떤 사람이 나한테 명함을 한 장 주더라구. 그 뒤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연락이 왔어. 한 번 보자는 거야. 그래서 어제 만났거든. 그런데 봉투를 내밀더라고.”
“봉투?”
“응. 열어보니 천만 원짜리 수표가 들어 있는 거야.”
막상 입을 열어 떠들다 보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지원은 생각보다 크게 놀라지 않았다.
“뭐? 천만 원? 그래? 무슨 일인데? 설마, 살인청부 같은 건 아니겠지?”
그녀가 쿡쿡 웃으며 호기심에 찬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글쎄 그게 좀 이상한 게…….”
“?”
“퀴즈를 풀라는 거야.”
“퀴즈?”
“응.” 이젠 조금 부끄러웠다.
“그래서……. 할 거야?”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자못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왜?”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거든.”
“네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뭔데?”
그녀의 질문은 언제나 중의적인 데가 있었다. ‘이것’을 묻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저것’을 묻고 ‘저것’을 묻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이것’을 물었다. 나는 그녀가 정말 묻고 싶은 게 뭘까를 먼저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녀가 정말로 묻고 싶은 것이 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눈을 굴리며 생각해보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라……. 많은 것들이 떠오르긴 했다. 세계를 일주한다거나 분쟁지역에서 자원봉사를 한다거나 근사한 회사에 취직한다거나 하는……. 그러나 그중에서 어느 것도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글쎄. 막상 말하려고 하니까…….” 나는 우물쭈물 얼버무렸다.
“말해본 적은 있어?”
“뭐?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
“응. 입 밖에 내서 말해본 적 있냐구. 한 번이라도.”
“음……. 있는 것 같은데.”
거짓말이었다. 나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도저히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황당한 소망들을 늘어놓으며 그 순간을 모면해 왔던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얼른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그렇다. 사람들은 남에게 별 관심이 없다. 그냥 할 말이 없으니 그런 뻔한 질문들을 던질 뿐이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취직했냐, 결혼 안 하냐, 묻는 것도, 사실은 아무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의 나는 누가 나에 대해서 물으면 그게 정말 궁금해서 묻는 줄 알고 온 힘을 다해서 대답을 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사람들은 그저 떠오르는 대로 지껄이는 거였다. 적당한 대꾸만 해주면 그들은 즉시 다른 질문으로 넘어간다. 뻔한 질문만 입력된 사이보그와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그런 사이보그들은 젊고 만만한 사람들을 만나면 단 몇 개의 질문으로 버틴다. 넌 취직은 안 하냐, 국수는 언제 먹냐 등등. 그럴 때는 그냥 딴생각을 하면 되는 것인데, 나는 언제나 “취직이 꼭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직은 제 자신에 대해 좀 더 알아보려고 합니다. 그게 우선인 것 같아서요. 그럼 취업도 자연히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같은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런 사이보그들이 원하는 것은 대화가 아니라 그냥 그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