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철학계에서 사교육 논술강사 시장을 겨냥해 대학생들에게 일정한 학점을 이수하면 자격을 부여하는 논술인증제를 추진하고 나서 철학계 내부는 물론 국문학과와 같은 다른 학문분야에서 크게 반발하고 있다. 지난 2일 창립총회를 갖고 출범한 전국 50여 개 철학과 모임인 전국대학철학과연합회(회장 배석원 경상대교수)는 파행적인 공교육기관의 논술교육을 바로잡고 동시에 기형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사교육시장의 논술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하여 올해 안에 논술인증제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논술인증제란 대학생들에게 일정한 철학관련 학점을 이수하면 철학계가 보증하는 자격증인 논술인증서를 발급하겠다는 것이다.
■“논술이 철학의 전유물이냐” 반발
한국철학회 이삼렬 회장(숭실대)도 “논술을 위해서는 논리 비판 종합 능력이 필수적인데 이는 철학과에서 가장 잘 가르칠 수 있다”며 “철학계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적극 지지의사를 밝혔다. 특히 이 회장은 “이미 논술시장에서 철학과 출신들이 크게 환영 받고 있는 것은 공지의 사실 아니냐”며 “대부분의 철학과 교수들은 제자들의 진로를 위해 논술인증제 실시를 찬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일 열린 한국철학회 총회에서도 이 문제가 논의됐고 한국철학회 이름으로 논술인증제를 실시하는 데는 부정적 의견이 있었지만 대학철학과연합회 이름으로 추진하는 데는 대부분 참석자들이 찬성했다는 것이다.
숭실대 국문과 조규익 교수는 “논술에서 철학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논술과 철학을 동일시하는 것은 문사철(文史哲)이 종합돼야 좋은 글쓰기를 할 수 있다는 논술의 기본을 무시한 것”이라며 “철학만이 논술을 보증할 수 있다는 식의 발상은 반(反)인문학적인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조규익 교수는 또 “대학에서 철학이 홀대를 받는다고 해서 나름의 자구책을 마련한 것 같은데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인증제가 글쓰기의 질 보장할까?
대철연 배석원 회장(경상대 철학)은 "좋은 글쓰기의 조건은 올바른 논리와 독창적인 논거를 제시하는 것"이라며 "논술인증과정을 이수하게 될 경우 글쓰기 기량뿐만 아니라 가치관 정립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분명 글쓰기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KAIST 전봉관 교수(국문학)는 "철학이 논술에 도움이 되는 것과 인증제가 논술에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 다르다"며 "좋은 글쓰기를 위해서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여러 분야에 걸친 풍부한 독서가 훨씬 효과적인데 인증제를 하게 될 경우 판에 박힌 글쓰기로 몰아갈 우려가 있다"고 인증제 실시 자체를 비판했다. 그러나 대철연과 한국철학회는 논술인증제를 강행한다는 입장이다.
■인문학 위기를 호도하는 것은 아닌가?
대철연은 창립 이유에서 “인문학 위기의 시대에 철학과 철학교육의 부흥을 꾀하여 교육과 나라를 살리자”며 논술인증제 실시가 인문학 위기, 좁게는 철학의 위기를 타개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철학계 내부에서도 비판이 나오고 있다. 한국철학회가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철학과연합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논술인증제를 실시하게 된 것은 이같은 비판을 의식해서다.
강단에서 벗어나 재야에서 철학연구와 교육으로 시민과 지식인 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는 철학아카데미 이정우 대표는 “보다 폭넓게 철학교육을 실시하면 철학이 놓여 있는 위기를 벗어나는 데 도움이 안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논술인증제가 인문학 위기 탈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장은 아무래도 비약이 심하다”고 지적했다.
■철학과 통폐합 움직임에 대한 자구책?
배석원 회장은 “우리가 논술인증제를 시행하려는 것은 철학교육을 통해 ‘철학도’로서 살아가는 데 유익한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보기에 따라서는 철학과를 졸업하거나 다른 학과 출신이 논술인증제를 이수하게 될 경우 논술강사 시장에서 현실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삼열 회장도 이 점을 부인하지 않았다. “철학과를 나온 제자들이 겪고 있는 취업난을 보면서 스승된 입장에서 이렇게라도 돌파구를 찾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익명을 요구한 서울대 철학과의 한 교수는 “전통적으로 철학과 출신들이 취업난을 겪고 있는 데다 지방의 경우 철학과들이 속속 폐지되거나 통폐합, 축소되고 있는 상황에서 사교육 시장에라도 진출해 자구책을 찾아보려는 것으로 이해한다”면서도 그것이 과연 위기에 처한 인문학, 철학의 처지를 얼마나 개선해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논술인증제란=
전국의 철학과를 대표하는 전국대학철학과연합회가 2008년 추진을 목표로 마련하고 있는 논술교육 2급 인증서를 받으려면 일단 제1분야 사고 및 논술(5과목 14학점 이상), 제2분야 철학내용(5과목 15학점 이상), 제3분야 고전읽기 및 글쓰기(2과목 4학점 이상), 제4분야 교직(2과목 4학점 이상)에서 B학점 이상을 취득해야 한다. 따라서 철학과 학생의 경우 자동적으로 이수를 하게 되지만 타학과 학생들에게는 부전공 이상의 부담이 주어진다. 연합회 산하 대학의 철학과에서 이상의 요건을 충족한 학생의 인증신청서를 제출하면 평가를 거쳐 ‘논술교육 2급 인증서’가 수여되고 2급 인증서 취득자에 한해 논술교육인증원이 실시하는 소정의 교육을 마칠 경우 ‘논술교육 1급 인증서’가 수여된다. 이렇게 취득한 인증서는 국가공인 자격증은 아니며 철학계의 이름으로 논술교육을 할 수 있는 자격을 보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