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은주가 올라가는 계절이 왔다. 오싹해지고 싶은 욕망의 눈금도 올라간다. 공포 영화와 소설에 선뜻 오감을 내맡기고 싶지만, 그런 끔찍한 상상력이 발원한 고전의 바다에 먼저 발을 담그기에 좋은 때이기도 하다.
‘기담 문학(奇談 文學) 고딕 총서’(생각의 나무)가 새롭게 선보였다. ‘이야기는 채워지지 않는 오래된 욕망이다. 이성의 세계와 등을 맞댄 무의식과 환상의 세계, 그곳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에 대한 사람의 갈증은 신화, 전설, 민담의 형태로 창조, 구전, 기록되었다’는 발간사를 내세운 총서다. 오늘날 영화에서 인터넷 게임에 이르기까지 팽배한 환상적 상상력의 고전들을 완역한다는 것이다. 이 총서가 표방하는 ‘고딕문학’은 18세기 유럽에서 시작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성찰하는 철학적 기반 위에 괴기한 분위기를 덧붙여 쌓아올린 이야기를 일컫는 초현실적 문학이다. 순수본격문학보다 한 수 아래로 치는 ‘장르문학’으로 폄하되기도 하지만, 문화 콘텐트의 경쟁 시대를 맞아 ‘중간문학’이란 이름으로 다시 각광받고 있다.
‘기담 문학 고딕 총서’의 최신작으로 19세기 미국 낭만주의 문학의 대표 작가인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의 소설 ‘알함브라’가 나왔다. 미국 문학의 고전이지만 우리말 번역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시리즈 중에서 먼저 선보인 ‘괴담’(라프카디오 헌), ‘붉은 죽음의 가면’(에드거 앨런 포), ‘오월의 밤’(니콜라이 바실라예비치)에 이은 책이다. 유혈이 낭자하고 비명이 허공을 찢는 공포 영화와 같은 직설적 충격을 안겨주는 소설은 아니다. 말할 수 없는 것 앞에서 침묵할 수 밖에 없지만, 그래도 그 말할 수 없는 분위기에 시적 감성을 투사해 밝혀낸 비밀스런 전설의 고향이 웅크려 있는 책이다.
‘여름날 안달루시아 한밤의 기온은 너무나도 영묘하다. 마치 우리가 더욱더 순수한 대기 속에 들어가 있는 것만 같다. 거기에 영혼의 고요함과 정신을 고양시키는 부력이 있으며 단순한 존재조차 기쁨으로 만들어주는 탄력이 있다. 알함브라를 비추는 달빛에는 마법 같은 무언가가 있다. 달빛 속에서 시간의 모든 균열과 틈, 모든 부패의 기미와 풍화의 얼룩은 사라지고 대리석은 태초의 흰 빛을 되찾으며 길게 줄지어선 기둥들은 밝게 빛나고 부드러운 광채는 홀들을 밝히며 이윽고 궁전 전체가 아라비아의 옛 이야기에 등장하는 마법의 궁전을 떠올리게 한다.’
알베르 카뮈가 지중해의 태양 아래 폐허에서 쓴 산문집 ‘결혼·여름’을 연상케하는 황홀한 마력의 산문들이 쇠락한 알함브라 궁전을 영혼의 달빛 아래 되살린다. 이 책의 작가 어빙은 알함브라 궁전을 찾았다가 거기에 얽힌 신비한 전설들을 기행문과 소설의 형식 속에 혼융시켜 독자들에게 상상력의 여행을 권유한다. 점성술사가 나타나 공주가 탄 말의 굴레를 쥐더니 망루 한가운데로 꺼져버리거나,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분수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물이 한 여인의 형상을 빚어버린다는 식의 몽환적 이야기들이 흩어져 있는 책이다.
‘세계가 그토록 광대한 것은 우리 모두가 그 안에서 흩어지기 위함이니’라고 괴테는 말했다. 이 책은 알함브라 궁전 유적에 배어있는 기기묘묘한 이야기들이 흩어져 숨은 채 어둠 속에서 달빛을 기다리는 광대한 환상의 세계를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