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시조 추모(주몽)왕릉은 어디에 있을까? ‘광개토태왕릉비’는 “추모왕은 왕위를 즐기지 않아 하늘에서 황룡을 내려보내 맞이하니,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라고 전하고 있고, ‘삼국사기’ 동명성왕 본기는 “재위 19년(서기전 19년) 9월에 승하했으니 나이가 40세였다. 용산(龍山)에 장사 지냈다”라고 전한다.
고구려의 첫 수도 환인(桓仁) 서남쪽에 본계시(本溪市) 소속으로 ‘쌀 창고 마을’이란 뜻의 미창구촌(米倉溝村)이 있는데, 마을 북쪽에 현지에서 장군묘라 부르는 높이 8m, 둘레 150m의 왕릉급 무덤이 있다. 중국 쪽에서는 부인하지만 환인에 있는 왕릉이라면 추모왕릉이 분명하기 때문에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최근 답사 때 이 마을에서 만난 조선족 노인(66세)은 20여 년 전 석실에 들어가니 왕(王)자가 여러 개 쓰여 있었고, 쌍룡 벽화도 있었다고 증언했는데, 이는 중국 측 보고서와도 일치한다. 왕릉이란 추측을 강하게 해 주는 증거들인데, 문제는 연화(蓮花) 문양이다. 연화는 불교와 관련이 있는데, ‘삼국사기’는 소수림왕 2년(372)에 진(秦)나라 왕 부견(符堅)이 불교를 전래했다고 전하니 4세기 후반이기 때문이다. 중국측 학자들이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조성된 무덤으로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발굴 조사에서 이 무덤은 조성한 다음 훗날 다시 봉토를 열어서 묘실(墓室) 바깥쪽에 3.4m 크기의 무문(無紋) 석비를 세웠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고구려인들이 무덤을 열고 다시 석비를 세웠다는 뜻이다. ‘광개토태왕릉비’는 “선조(先祖) 왕 이래 묘에 비를 세우지 않아 착오가 있었다”면서 광개토태왕이 “선조 왕묘 위에 비석을 세우고 그 연호를 새겨서 착오가 없게 했다”라고, 이때 일괄적으로 비석을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무덤이 광개토태왕 때 다시 수건(修建)한 추모왕릉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충분히 추론 가능한 해석이지만 이 선조의 유적 또한 중국인들이 배타적으로 관할하기 때문에 추측만 무성할 뿐 학문적으로 접근할 방법이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