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연극계 사람들과 알고 지내면서부터 공연을 자주 관람하게 된다. 지난주에는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박상현 연출의 ‘그림 같은 시절’이란 연극을 관람했다. 평일인데도 200석 규모의 관람석이 거의 들어차 마음이 뿌듯했다. 출연한 배우 중에 아는 후배가 있었던 것이다.
열두 명의 배우가 출연한 ‘그림 같은 시절’은 조선시대 선비와 기생의 불륜을 소재로 주위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풀어가면서 각자 인연의 업(業)을 해소하고 삶을 보다 넓게 끌어안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연극을 통해 나는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이랄 수 있는 한과 슬픔, 풍자와 해학, 운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되새겨볼 기회를 가졌다.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고 특히 감칠맛 나는 대사가 압권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공연이 끝나 밖으로 나오는데 뒷전에서 난데없이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재미없어! 그리고 무슨 연극을 두 시간씩이나 해?’ 순간 나는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마치 내가 공연 관계자라도 된 듯한 심정이었다. 근처 생맥줏집에서 공연을 끝낸 후배와 함께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나는 마음 한구석이 내내 찜찜했다. 어쩌면 소설가로서의 내 입장을 돌아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신인 소설가로 활동하던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재미’라는 표현은 문단에서 흔히 쓰는 용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대체로 경박한 표현으로 간주했다. 그러다 영화가 문화소비의 중심이 되고 휴대폰과 인터넷이 상용화되면서 모종의 위기감이 도래하자 문단에서도 언제부턴가 ‘재밌다’는 말이 작품의 미덕을 평가하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곧 새롭다거나 완성도가 뛰어나다거나 혹은 발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일까? 아니, 그보다는 ‘독자가 좀 읽어주겠군’이라는 뜻에 좀 더 가까운 것 같다. 요즘 유행하는 ‘소설의 위기’니 ‘문학의 종언’이라는 말도 실은 이와 무관치 않다. 온갖 오가는 말들이 있지만 요점은 독자수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얘기다.
관객이 없는 공연장을 상상할 수 없듯 독자가 없는 소설도 존재감이 불분명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독자에게 소설을 읽으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어째야 할까? 독자의 입맛에 맞춰 주문품을 생산해야 할까? 글쎄, 그 전에 왜 이토록 재미가 미덕인 세상이 돼버렸는지 한번쯤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인, 특히 대도시에 사는 현대인들은 온갖 욕망에 무분별하게 노출돼 있다. 먹고사는 문제도 버거운데 소비의 욕망으로부터 좀처럼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다. 텔레비전에서는 하루종일 홈쇼핑 광고를 내보내고 인터넷도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다. 그리고 거리의 저 숱한 간판과 네온사인의 유혹에 우리는 매일매일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차원에서 뭔가 재밌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문화를 진정제처럼 소비하고 있다. 그러나 문화(예술)의 속성은 그리 유쾌한 것이 못 된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삶에 대한 고민과 질문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문화는 진정제가 아니라 오히려 면역력을 기르는 비타민에 가깝다. 요컨대 문화라는 건 타인을 알아가는 과정처럼 어느 정도의 능동적인 자기 투자와 이해의 노력이 필요한 품목이다.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가치와 삶의 깊이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나 역시 재밌는 것이 좋고 즐겁게 살고 싶다. 하지만 쇼 오락프로그램처럼 강요된 웃음 뒤엔 늘 거대한 공허함이 도사리고 있다. 사람에겐 저마다 저울의 눈금으로는 잴 수 없는 존재의 무게가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