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지원의 이메일은 나를 안도시키기보다 긴장시켰다. 그녀는 일종의 게임을 제안하고 있었다. 퀴즈방에서의 채팅이 일종의 탁구 같은 거였다면 이건 테니스에 가까웠다. 그녀가 넣은 서브가 내 코트로 넘어왔고 이제 나는 리시브를 해야 한다. 아직 스코어는 러브-러브(0:0)!
그건 그렇고, 도대체 ‘현명하고 유쾌한 답장’은 어떻게 쓰면 되는 거야? 골치가 지끈거렸다. 참 이상하기도 하지. 왜 여자들은 남자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거기에서 기쁨을 느끼는 걸까? 그냥 전화하고 약속 잡고 그렇게 만나서는 차가운 생맥주를 마시며 놀면 안 되는 걸까?
나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서성대려고 했으나 방이 너무 좁아 그럴 수가 없었다. 답답하거나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때마다 자주 하는 버릇이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포기해야 했다. 나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바로 그때 벽 너머로 희미하게 인기척이 들렸다.
옆방녀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가방을 내려놓는 소리, 겉옷을 벗는 소리, 의자의 다리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옆방녀에게 이메일을 보여주고 한 번 상담을 해보는 건 어떨까? 같은 여성이니 나보다는 훨씬 더 저 이메일을 잘 해석(혹은 번역)해낼 수 있지 않을까? 잠시 진지하게 그 문제를 생각하다가 그러지 않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현명하고 유쾌한 답장’을 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첫 문장을 쓰는 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또다시 이런저런 포털 사이트를 전전하며 온갖 루머와 가십의 숲에서 헤매며 첫 문장을 쓸 시간을 뒤로 미루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마침내 첫 문장을 썼다.
지원에게
네 메일 읽고 나서 도대체 무슨 얘기를 써야 ‘현명하고 유쾌한’ 답장이 될까를 고민하고 있었어.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런 답장을 쓸 수 없을 것만 같아. 그런 멋진 역할을 포기하니까 드디어 이렇게 글이 써지는 것 같아.
놀이터에서 너를 처음 만났을 때를 나는 자꾸 생각하고 있어.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때 조금 얼이 빠져 있었던 것 같아. 아니 그 정도 표현으로는 좀 부족한 것 같아. 그러니까 네가 바로 내 옆에 또는 내 앞에 앉아 있는데도 네 얼굴이 전혀 안 떠오르는 거야. 그래서 깜짝 놀라 너를 보면 너는 어디에도 가지 않고 바로 거기에 앉아 있어. 얼굴도 알겠고…. 아, 그래, 이런 얼굴이었지. 이 사람이 바로 서지원, ‘벽 속의 요정’이었지. 그런데 다시 시선을 돌리면 네 얼굴의 구체적인 생김새가 전혀 기억 나지 않는 거야. 바로 방금 전에, 불과 몇 초 전에 봤는데도 말이야. 눈이 어떻게 생겼더라? 눈이 큰 편이었나? 기름했나? 그럼 코는? 낮았나, 높았나? 누구하고 닮았다고 해야 하지? 그 순간에 누가 만약 그런 것들을 물었다면 아마 나는 대답하지 못했을 거야. 사람이 우뇌의 특정 부분에 충격을 받으면 이런 비슷한 일을 겪는다고 해. 사람들의 얼굴을 세밀하게 구분하거나 기억하지를 못한대. 찰리 채플린 사진은 알아봐도 자기 아내는 못 알아보는 거야. 물론 나에게는 그런 병은 없어. 예전에도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오직 그 순간에만 그랬던 거야.
나도 놀라워. 왜 그랬을까. 나는 계속 그것을 생각하고 있어. 어쩌면 아내를 찾아 지옥 밖으로 데리고 나오던 오르페우스의 마음 같은 것 아닐까? 에우리디케를 돌아볼 수 없었던 이유와 비슷한 게 아닐까? 너라는 인간이 그렇게 가까운 곳에 실재한다는 게 믿을 수 없었던 건 아닐까? 마치 환영처럼, 유령처럼 느껴졌던 것은 아닐까? 의심하거나 다가가 만지거나 하면 안개처럼 사라져버릴까봐, 그래서 내 뇌의 어떤 부분에서 너라는 사람의 이미지를 저장하고 분류하는 것을 막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바보 같은 생각까지 하게 됐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