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홍익대학교의 정문에서 가까운 커피집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정했다.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양손으로 재킷을 뒤집어 흔들어대자 그의 명함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다른 평범한 명함처럼 흰색 바탕 위에 검은 색으로 그의 이름과 전화번호, 이메일이 적혀 있었다. 단지 좀 색다른 점은 회사나 단체의 이름이 적혀 있어야 할 자리에 “Fata regunt orbem! Certa stant omnia lege” 라는 도무지 알아먹을 수 없는 문구가, 조금은 과장된 글자체로 인자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그것은 회사 이름이 아니라 “불확실한 것은 운명이 지배하는 영역. 확실한 것은 무릇 인간의 재주가 관할하는 영역”이라는 라틴어 격언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한참을 들여다보았지만 감이 오지 않았다. 어찌 보면 뻔한 말인데 그렇기 때문에 또 어찌 보면 이상한 말이었다.
제갈공명의 “일은 사람이 하고 이루기는 하늘이 한다”는 말의 라틴어 버전일까? 그렇다면 세상에 이런 이치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명함에 이런 문구를 새기고 다니는 사람이 과연 무슨 일로 나를 만나자고 하는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잠깐 만나서 커피 한잔 한다고 무슨 대수랴 싶었다.
나는 다시 지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와 내가 만난 채팅방 사이트는 접속을 하면 다른 사용자의 프로필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주소나 전화번호까지 알아내기는 어려워도 대부분의 경우 이메일 정보는 공개하는 편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노트북 컴퓨터를 켰다. 왜 지금껏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걸까? 이렇게 멍하니 누워서 전화를 기다리느니 짐짓 태연한 척, 이메일을 보내면 될 것을……. 그날은 잘 들어갔느냐, 나도 잘 들어왔다. 나는 무척 즐거웠는데 너는 어땠느냐? 시간 될 때 전화 한번 달라. 혹시 메신저 사용하면 그 번호도 좀 알려달라. 뭐 이런 메일 한 통을 보낸다고 해서 그녀가 나를 한심한 찌질이로 보지는 않을 것이었다.
나는 컴퓨터가 다 부팅되자 브라우저를 띄우고 채팅 사이트에 접속을 했다. 그녀의 아이디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프로필을 띄우자 그녀의 이메일이 떴다. 이메일뿐 아니라 쪽지도 보낼 수 있게 되어 있었지만 쪽지는 채팅 사이트에 접속하지 않는 한 볼 수 없었다.
나는 이메일을 보내보기로 마음을 먹고 그녀의 이메일 주소를 복사한 후, 메일 클라이언트 프로그램을 띄웠다. 메일 프로그램이 뜨면서 접속하지 않은 사이 내게 보내진 메일들이 “받은 편지함”으로 내려와 차곡차곡 쌓였다. 습관적으로 “받은 편지함”을 클릭하던 나는 깜짝 놀라 머리를 모니터에 처박았다. 몇 통의 스팸메일 사이에 “벽 속의 요정”이라는 발신자의 이메일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이메일을 보내오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기 때문에 반갑다기보다는 오히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왜 내 전화번호도 알고 있는 친구가 이렇게 이메일을 써서 보냈을까? 그래서 마우스의 커서를 이메일 제목 위에 가져다 놓고도 잠시 클릭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마우스를 클릭했고 잠시 후, 이메일의 내용이 화면 위로 떠올랐다.
안녕!
놀랐지? 나 스토커 아니야. 그냥 무심코 누른 네 프로필에 이메일이 있기에 눌렀더니 이렇게 아웃룩이 떠버리잖아. 아, 이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적어보는 거야. 초등학생 때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유치찬란한 분홍색 편지지 사다가 이것저것 말도 안 되는 거 적어서 여기저기 잘도 보냈는데 이제는 이메일에 뭘 적는 것도 되게 어색하네. 이것도 그 시절의 분홍 편지지처럼 벌써 아주 오래된 매체가 돼버린 느낌이야. 일단 길게 써야 되고 뭔가 편지 형식을 지켜야 할 것 같고 서두에는 날씨 얘기도 넣어야 될 것 같고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