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汎)여권은 16일 ‘박상천 살생부(殺生簿)’ 논란으로 온종일 시끄러웠다. 민주당 박상천 대표가 여권 통합에서 ▲국정 실패 책임자 ▲좌파 성향 인사 ▲친노(親盧) 인사 등을 배제 대상으로 꼽은 것에 대해, 열린우리당은 지도부 등이 모두 나서서 ‘살생부’라고 강하게 성토했다.
열린우리당 정세균 의장은 이날 아침 확대간부회의에서 “민주당 박상천 대표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누구누구와는 같이 못한다고 했는데, 이제 대통합은 물 건너간 것 같다”며 “살생부에서 살아남는 사람이라도 자존심을 버리고 갈 사람 누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장영달 원내대표는 “박 대표 말대로 당을 만들면 그것은 ‘호남 한나라당’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어 오전 10시30분 국회 의원회관에 열린우리당 초·재선 의원 10여 명이 모였다. 임종석 의원은 모임 후 브리핑에서 “박 대표가 추진하는 통합에는 열린우리당 재선 의원과 ‘처음처럼’ 중심의 초선 의원들은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들 초·재선 의원들은 박 대표가 통합 대상으로 꼽은 인물들이다. ‘처음처럼’ 모임의 간사인 우상호 의원은 “박 대표가 정 의장을 능멸했다”며 “다시 ‘백바지-런닝구’ 논쟁을 해보자는 거냐”고 했다. 열린우리당 내 실용(런닝구)·개혁파(백바지)가 벌였던 논쟁을 가리키는 말로 주로 구(舊)민주당 출신을 런닝구로 부른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의 전체적인 기류는 ‘박상천 암초’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통합 논의를 진전시킬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이 돼 버린 것이다. 일부에선 민주당과의 통합을 포기하고 당을 ‘리모델링(개조)’하는 쪽으로 선회하자는 얘기까지 나왔다. 한 재선 의원은 “지금까지 초·재선들이 통합을 위한‘제3지대론’에 모이고 있었는데 박 대표의 살생부가 나오면서 이 얘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했다.
정세균 의장이 15일 저녁 범여권의 유력한 주자인 손학규 전 경기지사와 비공개로 만난 것도 교착상태를 헤쳐나가기 위한 돌파구 마련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날 만남에 대해 정 의장측은 “범여권 대통합을 위한 의견을 폭넓게 나눴다”고 했고, 손 전 지사측은 “새로운 정치를 위해 좋은 의견을 나눴다”고 했다. 양측은 구체적인 얘기는 없었다고 하나 정 의장이 손 전 지사에게 오픈 프라이머리 참가를 우회적으로 제안하는 자리가 아니었겠느냐는 관측이 나온다.
박 대표가 우선 통합대상으로 꼽은 중도개혁통합신당의 김한길 대표도 이날 “박 대표가 말하는 배제대상을 다 빼고 나면, 통합을 해봐야 예비주자가 하나도 없는 세력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김 대표와 박 대표는 오는 21일 만나 통합 협상을 재개하기로 했다.
민주당 유종필 대변인은 “국정 실패 책임자들도 통합 대상에 넣자는 말은 대선 승리는 안중에도 없고 내년 총선에만 매달리는 지극히 이기적인 발상”이라고 했다. 최인기 의원은 “민주당은 살생부의 ‘살’ 자도 꺼낸 적이 없는데, 이에 해당하는 본인들이 스스로 제 발이 저려 소란을 떤다”며 “민주당이 지향하는 통합정당은 국정 실패의 책임을 씻어내주는 세탁소가 아니다”고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