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8월 독일과 소련 외무장관이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세상은 “히틀러와 스탈린이 조약 뒤에 뭔가 숨긴 것 아니냐”고 의심했다. 아니나 다를까 9월 독일과 소련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폴란드를 침공해 절반씩 점령했다. 소련은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발트3국과 핀란드까지 병합했다. 양국이 주변국들을 갈라먹기로 한 ‘비밀의정서’의 존재는 2차대전 직후 연합국 문서로 확인됐다.

▶에스토니아 시인 크로이츠발드는 서사시 ‘칼렙의 아들’에서 민족의 선조, 거인 칼렙을 노래했다. 칼렙이 죽자 아내 린다가 남편 무덤에 올려놓으려던 큰 돌이 떨어진 곳이 지금 국회의사당 자리이고, 린다가 흘린 눈물이 수도 탈린 한복판 호수가 됐다고 한다. 슬픈 전설처럼 에스토니아는 스웨덴, 독일 등 주변국들에 시달리다 1918년에야 러시아로부터 독립해 처음 나라를 가졌다. 그런 에스토니아를 1939년부터 1991년까지 다시 강점한 러시아가 고울 리 없다.

▶에스토니아는 지난 4월 옛 소련 잔재를 없애려고 탈린에 있는 소련군 동상을 철거하겠다고 나섰다. 러시아는 국교를 끊고 에스토니아 제품 불매운동을 벌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푸틴 대통령도 “전쟁 영웅의 동상을 더럽히려는 자들이 불화의 씨를 뿌린다”고 비난했다. EU 회원국 에스토니아는 “18일 러시아에서 열리는 EU·러시아 정상회담을 취소하도록 압력을 넣겠다”고 맞서고 있다.

▶에스토니아는 면적이 남한의 절반도 안 된다. 인구 134만에 불과한 에스토니아가 1억4280만 러시아를 상대로 벌이는 싸움은 그야말로 ‘100대1의 대결’이다. ‘발트해의 호랑이’라는 별명처럼 에스토니아는 예전의 소국이 아니다. 독일 한자동맹의 중심이었을 만큼 근면하고 장사에 밝은 에스토니아 사람들의 1인당 GDP는 러시아의 2배 가까운 1만2203달러나 된다.

▶에스토니아는 ‘e-스토니아’로 불릴 만큼 IT산업이 눈부시게 발전했다. 택시에서도 무선 인터넷을 할 수 있을 정도다. 국민 한 사람이 평균 3개 국어를 구사하고, 일주일이면 회사를 세울 수 있을 만큼 기업 여건도 좋다. 연 평균 경제성장률은 11%대에 이른다. 에스토니아엔 일제 때 러시아로 이주했던 ‘고려인’ 200여명이 지금도 살고 있다고 한다. 끝없이 외침(外侵)에 시달려 온 이 작은 나라가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러시아에 당당히 맞서는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게 대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