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아뇨. 그렇지 않아요. 그런 말 듣고 기분 나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우리는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시선의 온도가 눈에 띄게 따뜻해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버섯탕도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수저를 들지 않고 있었다.
“정말 민수씨는 인생이 일회용이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태어난 곳에서 얼마 전까지 살아왔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하루하루가 무한히 반복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다시 반복되는 것은 없는 것 같아요. 퀴즈방에서 처음 지원씨 만났을 때, 정말 좋았거든요. 그런데 그 느낌, 그 감정은 다시 되새길 수 없는 거잖아요. 벌써 지나가버린 거죠. 오늘도 이대로 지나가버리면 영원히 다시 경험할 수 없을 거예요.”
그녀가 불쑥 제안했다.
“우리 말 놓을까요?”
“왜 갑자기?”
그녀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에 민수씨가 한 말을 반말로 다시 듣고 싶어서요.”
‘사랑이 솟구친다’는 말을 비유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인생의 어떤 특별한 순간에는 비유가 현실이 된다. 나는 두뇌 깊숙한 곳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의 물질이 분수처럼 솟구쳐 대뇌피질의 모든 주름을 흥건히 적시는 것을 느꼈다.
“그래. 그러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난 지 30분도 안 돼 우리는 말을 놓기 시작한 것이었다. 출발이 좋았다. 그녀는 재미있는 장난을 생각해낸 어린아이처럼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아마도 반말로 말하게 될 첫 번째 문장을 고른 것 같았다.
“이민수. 너 좀 귀엽다.”
그러더니 부글부글 끓는 버섯탕에 숟가락을 집어넣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대꾸도 못한 채 그녀를 따라 밥을 먹기 시작했다. 무슨 맛인지도 모를 뜨거운 국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우리는 밥을 나누어 먹으며, 평소라면 전혀 웃지 않았을 이야기에 키득거리며, 뒤늦게 소주도 한 병 시켜 먹으며, 퀴즈방의 다른 아이디를 평하며, 그렇게 한 시간을 보냈다.
“근데 너, 나는 어떻게 알아본 거야? 방송에서 말이야. 내 이름도 몰랐을 텐데.”
나는 전부터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너는 정은영인가 하는 여자를 나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그걸 어떻게 알았어?”
“다 아는 수가 있지. 얼굴에 써 있던 걸. 마르코 폴로도 그 여자한테 양보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지?”
“아니, 아니야, 그건.”
“실망이야. 나를 못 알아보다니. 난 단박에 알아봤는데.”
그녀가 원망의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푹,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그 여자한테 다가가서 ‘벽속의 요정’이냐고 물을 때, 나는 바로 너 뒤에 서 있었어.”
“정말?”
“마음 속으로 텔레파시를 보냈지. 돌아볼 거야. 돌아보고 나를 알아볼 거야. 그렇게 주문을 걸고 있었는데 네가 그 여자한테 나냐고 묻더라고. 실망해서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왔었어.”
“왜 그런데 난 너를 본 기억이 전혀 없지?”
“너는 그 정은영한테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으니까.”
“아니야. 그냥 한 번 그쪽으로 생각을 하니까 정말 그런 것 같더라고.”
“예뻐서 그런 건 아니고?”
“아니, 절대 아니야. 걔가 예쁘긴 뭐가 예뻐?”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럼 그날 방청객으로 와 있었던 거야?”
“아니.”
“그럼 뭐야?”
“너, 정말 오늘은 머리를 쓰기 싫은가 보구나. 그럼 말해 줄게. 나 실은 그 퀴즈쇼의 구성 작가야.”
그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시나리오라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이상하다. 내가 작가들도 다 봤는데. 작가들이 돌아다니면서 출연자들 엄청 챙기던데. 연습도 시키고.”
“두 팀이 돌아가거든. 한 팀이 매주 소화하기에는 벅차기 때문에 두 팀이 격주로 하는 거야. 그날은 우리 팀이 하는 날은 아니었는데 방송국에 나와 있던 참이라 방청석에 앉아서 구경하고 있었던 거야.”
“아, 그랬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