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체로 인간은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그다음에 편지를 보내 그 사랑을 고백한 후, 그 열정이 받아들여지면 만나서 연애를 했다. 외할머니만 해도 중고등학교 시절에 편지질을 하는 동네 남자애들 때문에 아주 골치를 썩었고, 결국은 외할아버지와도 그런 식으로 결혼을 하게 됐다고, 자랑인지 푸념인지를 늘어놓곤 했다.

그러나 요즘의 어떤 인간은 먼저 사랑에 빠진 후에야 그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하고 그 연애를 진전시키기 위해 나처럼 이렇게 육신을 움직여 ‘만남의 광장’으로 나가기도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남녀 사이에만 그런 식의 만남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가수와 배우, 정치인과도 그런 식으로 사랑에 빠지지 않는가? 먼저 사랑하고 나중에 확인하는, 선(先)사랑 후(後)확인. 우리는 흠모하는 가수의 콘서트에 가고 밤을 새워 읽은 작가의 사인회에 가서 잘 알아보기도 어려운 글자 몇 자를 얻어오기도 한다. 음, 나만 이상한 건 아니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초조한 마음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는 것 같았다.

그림= 이우일

몇 명의 용의자가 내 앞을 지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을 두었다. 이것 봐, 이민수. 열여섯, 열일곱의 십대 고딩도 아니고, 적어도 이런 만남에 큰 기대를 품지 말아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네가 여기 나온 건, 굳이 말하자면 그냥 일종의, ‘인간에 대한 예의’인 거야. 너와 그녀는 오랫동안 밤마다 대화를 나눈 친구잖아. 취향도 비슷하고 나이도 같고. 만약에 네가 이 만남을 거절했다면 그건 무례한 짓이었을 거야. 안 그래? 나는 대답도 했다. 그렇지. 그렇고 말고. 그러니까 오늘은 그냥 만나서 자연스럽게 얘기나 나누는 거야. 이런 친구 하나 둬서 나쁠 건 없잖아?

그러나 한편에서는 그와 반대되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너에게 실망하게 될 거야. 고아에 직업도 없이 고시원에서 사는 남자를 누가 좋아하겠어? 취향? 그것도 계급이 비슷할 때나 통하는 얘기지. 계급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네가 감당 못할 취향을 드러낼 거야. 겨울이면 브로드웨이나 코벤트 가든으로 뮤지컬을 보러 다니는 취향일 수도 있고 여름이면 연례 행사로 발리의 스파 리조트에 갈 수도 있잖아? 뭐 꼭 그렇게 극단적이지 않다고 해도 적어도 이십대 후반의 남자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그 무엇이 너한테는 결여돼 있잖아. 이를테면 “내가 만든 봉골레 스파게티, 궁금하지 않아?” 이러면서 데려갈 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응, 이따가 회사 앞에서 만나”라고 말할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야. “아, 우리 부모님? 평범한 분들이셔. 아빠는 요즘 골프에 미쳐서 주말에도 얼굴 보기 힘들고 엄마는 엄마대로 이런 모임 저런 모임으로 바쁘신가 봐. 사이가 썩 좋은 건 아닌데, 같은 대학을 나와서 그런지 싸울 땐 싸워도 서로 통하는 게 있는 것 같아. 이번 주엔 두 분 스페인 여행 가셨어. 결혼 30주년이시거든”이라고 말할 부모가 있는 것도 아니지.

주변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도시의 어둠은 산야의 어둠과 달랐다. 어쩔 수 없이 어둠에게 자리를 내주고 퇴각한다는 식이 아니라 어둠이 빛 사이로 몰려오는 것 같다. 그러니까 시골에서처럼 어둠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세상을 덮는 게 아니라 발목을 적시면서 무릎부터 차올라 어느새 세상이 그 어둠 속에 잠겨 드는 것 같다. 어쨌든 놀이터는 어두워졌고 바람도 좀 더 차가워졌다.

무릎 위에 펴놓은 책으로 시선을 떨구려는 찰나 내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이민수씨죠?”

“네, 저 맞는데요. 그럼 서지원씨?”

“네. 늦어서 죄송해요.”

그녀가 미안한 듯 살짝 웃었다. 내가 벤치에서 조금 옆으로 비켜 앉자 그녀는 오래 사귀어 온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았다. 우리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우리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고 싶었다. 조금 전에 본 얼굴이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투명 인간과 인사를 나눈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