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새벽 4시, 존 줄리어스 노리치(Lord John Julius Norwich·77·사진) 경(卿)이 런던에 있는 자택에서 청년 같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뭐라고요? 잘 안 들리니까 잠깐만 기다리세요. 보청기 좀 끼고 올게요.”

노리치 경은 런던 자택에서 만찬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대대로 작위를 물려받는 귀족이다. 부친 더프 쿠퍼(Cooper·1890~1954)는 외교관이었고, 모친 다이애너(1892~1986)는 공작의 딸로 태어나 한때 날렸던 배우였다.

부친은 사교계의 미녀들과 잇달아 염문을 뿌렸고, 모친은 너그럽게 웃어넘겼다고 한다. 그녀는 훗날 아들인 노리치 경에게 말했다. “네 아버지에게 그 여자들은 고작 꽃(flower)이었지만 나는 나무(tree)였단다.”

쿠퍼는 성공한 외교관이었을 뿐 아니라 방대한 일기를 남긴 작가이기도 했다. 노리치 경도 어려서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다. 그는 명문교 이튼과 옥스포드 대학을 졸업한 뒤 외교관이 됐다. “뜻하지 않게 외시에 붙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언론인이 됐을 걸요.”

노리치 경은 12년간 옛 유고슬라비아의 베오그라드와 레바논 베이루트에 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동방의 역사에 빠져들었다. 비잔티움 종교 예술이 특히 매혹적이었다. 그는 “익숙한 서유럽 유적과는 달리, 비잔티움 유적은 너무나 새롭고 낯설고 아름다웠다”고 했다.

그는 1960년 외무부를 박차고 나와 전업 작가가 됐다. ‘비잔티움 연대기’ 3부작은 그가 1994년까지 7년 걸려 쓴 책이다. 그는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는 대목, 술탄 메메드가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키는 대목을 쓰는 게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뉴욕타임스지(紙)는 노리치 경의 문장에서 ‘로마제국 흥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1737~1794)의 메아리가 들려온다고 썼다. 노리치 경에게 “기번과 자신을 비교한다면?” 하고 묻자 그는 “세상에! 나 같은 ‘초보 역사가’가 어떻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가에게 스스로를 견주겠어요?” 했다. 그는 시종 겸손하고 유쾌했다. “기번처럼 쓸 능력은 없지만, 그의 우아한 문장과 유머는 본받고 싶다”며 “역사책은 그 자체로 문학작품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노리치 경은 “나는 형사(detective)가 아니라 이야기꾼”이라고 강조했다.

“나는 새로운 역사적 진실과 이론을 찾아 다니기 보다는, 보통 사람들에게 그들이 미처 몰랐던 과거에 대해 흥미롭게 이야기해주는 게 좋아요. 사료를 읽고 책을 쓰면서 교훈(lesson)을 많이 얻었냐고요? 오, 전 그저 역사를 즐겼는데요!”

그는 비잔티움 역사에서 가장 매혹적인 인물로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팔라이올로구스를 꼽았다.

“싫은 사람은 누구냐”는 질문에 그는 “너무 많아서 모르겠네요! 잔인한 시대였으니까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