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없었던 조선시대 당시의 모습을 가장 실감나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김홍도의 풍속화이다. 모두 25점으로 이루어진 ‘단원풍속화첩’에는 당시 사람들의 삶이나 사회상이 한국적 해학과 정취가 곁들여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민본주의 전통에서 자라난 풍속화

한국미술사에서 풍속화의 본격적인 발전이 이루어진 것은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서였다. 그 중에서도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와 혜원(蕙園)신윤복(申潤福, 1758~?)과 같은 풍속화의 거장을 배출했던 조선 후기의 풍속화는 한국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빛나는 업적으로 평가된다. 특히 이 시기의 풍속화는 일반 서민들의 생활상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은데 이것은 조선 후기에 일어난 사회 전반적인 변화, 즉 '시민의식의 성장'과 '실학사상의 발흥' 등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사회적인 추세는 학문과 예술 전반에 걸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했는데 그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바로 관념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현실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에 서민들의 생활상을 그린 풍속화들이 유행하게 된 데는 관념중심에서 벗어난 현실중심의 사회적, 학문적 분위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들이 기존 체제에 대한 일종의 항거정신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서민들의 모습을 화폭에 즐겨 담았던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풍속화가 김홍도, 신윤복 같은 이들은 왕실에서 총애를 받던 '도화서(圖畵署)'의 화원화가들이었으며, 나중에는 관직을 받기까지 했다. 조선 왕조의 근본적인 정치이념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임을 내세우는 민본주의였으며 현실에 바탕을 둔 인간중심의 현세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훌륭한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일반 백성들의 풍속이나 생활상, 특히 땀 흘리며 열심히 살아가는 백성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잘 살펴야만 했다. 또한 외국 사신들에게 한국의 풍속을 소개하고 이해시키기 위한 외교적 필요성과 국가적 행사와 의식을 기록적인 그림으로 남겨 후세에 전하고자 한 목적 때문에라도 사실적인 풍속화를 장려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이러한 정치이념과 성향이 현실적인 삶을 소재로 한 풍속화를 발전시킨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서민의 정서와 삶에 밀착된 민중화가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김홍도의 시대에 오면 풍속화는 서민은 물론 임금까지도 사랑하는 장르가 되어 화원시험 중의 한 과목이 되었다. 김홍도의 풍속화는 서민들의 소박한 일상생활을 꾸밈없이 표현하고 있어 각 계층의 생업장면과 놀이 등 생활의 이모저모가 잘 나타나 있다.

그의 대표적 풍속화인 '자리짜기'는 방안에서 돗자리를 짜고 있는 남편과 물레를 돌려 실을 잣는 아내, 그리고 그 뒤편에는 책을 펴놓고 글자를 막대기로 짚어가며 읽고 있는 떠꺼머리 아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양반 집의 풍경은 아닌데도 당시 18세기 후반의 조선시대 사회의 변화가 느껴진다. 고된 노동임에도 아들의 글 읽는 소리에 피곤함을 잊은 듯, 부부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비친다.

평범한 일상사를 화가의 따듯한 시선과 예리한 시각에 의한 순간포착으로 이를 볼거리로 부각시켜 그림이 그려진 당시 사회의 분위기를 잘 전해 준다. 김홍도는 조선 후기의 농민이나 수공업자 등 서민들의 생활상을 간결한 필치로 간략하면서도 한국적 해학과 정취가 곁들여진 풍속화를 그렸다. 단순히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기록화적 성격으로 그려졌다기보다는 서민의 심성으로 파고들어서 나온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시각을 가지고 새롭게 해석하고 있으며, 그림 속 인물 하나하나가 마치 자신의 삶에서 그대로 들어와 박힌 듯, 주변 인물 하나에도 각기 다른 표정과 모습이 부여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그림을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이야기 하는 삶의 다양하고 따듯한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