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회강연에 자신을 닮은 사람을 내보내고, 비타민을 먹고 캔버스에 오줌을 싸서 생기는 생화학적 효과를 작품에 활용하고, 프랑스에서 찍은 사진을 모아 ‘아메리카’라는 제목의 사진집을 묶어내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촬영한 8시간짜리 영화를 만들고, 소설이라면서 다른 사람과의 전화 통화를 받아적은 책을 출간하고, 자신이 쓰던 가발 중 몇 개를 액자에 담아 고이 보관하고…. 팝아트의 전설적인 작가 앤디 워홀과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앤디 워홀 팩토리’를 보기 전에 관련 서적 몇 권을 들춰보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팩토리라는 말이 영 낯설었기 때문이다. 팩토리(factory)는 앤디 워홀의 작업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조수와 함께 실크 스크린 작업을 하고,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마약을 하기도 하고, 처음 방문하는 사람을 필름이 다 될 때까지 카메라 앞에 앉혀두기도 하는 공간이었다. 팝아트적이고 사이키델릭한 분위기의 살롱인 셈이다. “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라는 말과 함께, 팩토리는 앤디 워홀의 작품세계를 상징적으로 압축하고 있는 공간이자 용어이다. 대중매체와 대량생산과 관련된 앤디 워홀적 은유가, 다름 아닌 기계와 공장인 것이다.
앤디 워홀은 대중매체와 대량생산이라는 현대적 삶의 조건을 예술의 지평과 융합시킨 작가이다. 피카소가 서구에서 대중매체의 각광을 받은 최초의 화가이고 대중매체를 이용해 창작의 자유를 지키고자 한 예술가였다면, 앤디 워홀은 스스로 미디어의 일부가 되고자 했고 공장의 생산성을 예술의 영역과 융합하고자 한 예술가였다. 대중매체가 쏟아내는 이미지를 활용하고 대중매체에 스스로를 노출시킴으로써, 그는 예술작품의 마케팅 차원을 예술창작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또한 예술은 장인적인 기교가 요구되는 수공업적인 생산이라는 전통적인 관념에서 벗어나서, 공장의 대량생산과 흡사한 산업적인 복제의 차원으로 예술의 방법론을 바꾸어 놓았다. 그 지점에서 예술은 개인적인 작업이 아니라 하나의 프로젝트가 되며, 예술가의 정체성은 전략적이면서 모순적으로 구성된 브랜드를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 오늘날 자리를 잡은 아트 비즈니스의 원초적인 모습을 앤디 워홀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공장과 기계의 이미지 때문일까. 전시를 둘러보면서 앤디 워홀이 점점 사이보그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그는 활용할 수 있는 모든 미디어 테크놀러지를 작업에 도입했다. 1962년에 실크스크린을 처음 사용한 이래로 그는 팩토리 안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들을 기록했고 녹음했고 촬영했다. 실크스크린, 녹음기, 촬영기, 사진기 등은 그가 없는 곳에서 예술-작업을 하는 앤디 워홀의 또다른 몸이었다. 사이보그를 유기적 생물과 기계 장치의 결합체라고 한다면, 앤디 워홀은 미디어 테크놀러지를 자신의 상상적인 육체로 생각한 사이보그였던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용된 맥락은 다르지만, 사이보그와 관련한 다나 해러웨이의 말은 앤디 워홀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사이보그는 기계와 유기체의 잡종교배이며, 사회적 실재임과 동시에 허구의 산물이다.” 성적·계층적·매체적·양식적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었던 그의 예술은, 어쩌면 사이보그의 자기증식과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브릴로 상자, 캠벨 수프, 마릴린 먼로, 마오쩌둥 등을 복제한 작품들을 둘러 보는 동안, 플라톤의 ‘국가’에 등장하는 예술론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널리 알려진 대로 플라톤에게 있어 이데아(형상)는 다양한 현상 뒤에 있는 궁극적 실재이자 기원이다. 이데아는 감각을 초월한 것이기에 인간이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인간의 감각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이데아의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플라톤을 따라서 침대를 예로 든다면, 신이 만든 침대의 이데아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목수가 이데아를 모방해서 만든 사물로서의 침대가 놓인다. 그렇다면 침대를 그린 화가의 그림은 어떨까. 그림은 이데아에 대한 모방의 모방이어서 실재로부터 2단계나 떨어진 자리에 있다. 모방에 모방이 겹쳐질 수록 이데아에 대한 망각과 변형이 심화된다. 플라톤은 실재에 대한 망각을 막기 위해서 상기(想起)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앤디 워홀의 전략은 무엇일까. 플라톤이 본질로부터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 발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서는 지점, 바로 그 지점에서 앤디 워홀은 플라톤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나간다.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실재에 대한 망각은 가속화되고 이미지의 표면성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원의 이야기는 이미지들 속에서 파편 또는 흔적의 모습으로 흐릿하게 복제될 것이다. 그렇다면 기원은 없어지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앤디 워홀이라는 브랜드가 새로운 기원으로 자리를 잡는다. 하지만 앤디 워홀이라는 기원은 초월적인 기원과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앤디 워홀이라는 기원 자체가 기술적 복제와 대중적 확산의 효과이자 산물 때문이다
앤디 워홀은 현대의 중요한 문화적 기원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문화적 기원으로서 앤디 워홀은 단지 예술적인 새로움 때문이 아니라, 수없이 복제하고 복제되었기 때문에 기원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는 저 멀리 역사의 초월적 지평 위에 고독하게 서 있는 기원이 아니라, 흩뿌려져 있는 기원들이며 지금도 복제되고 있는 기원이 아닐까. 그래서 앤디 워홀을 만나는 동안 왠지 모를 친숙함이 미술 문외한을 따라다녔던 것이 아닐까.
(김동식 인하대 국문과 교수)
●계간지 문학동네에 ‘글쓰기의 우울’로 등단. 문학평론집 ‘냉소와 매혹’, 문화평론집 ‘잡다’ 등이 있음.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6월 10일까지 ‘앤디 워홀 팩토리’전이 열린다. 오전 10시30분~오후 6시. 매주 월요일 휴관. 목요일은 오후 9시까지 연장 개관한다. 관람시간 끝나기 한 시간 전까지 입장 가능. 일반 7000원, 청소년 4000원, 미취학 아동 무료. 인터넷 예매시 30% 할인. (02)2014-6901, www.leeu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