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법무실은 준법 경영의 '파수꾼'(삼성 이종왕)이자 '촉매자'(현대차 김재기), 기업의 '감초'(甘草)(LG 김상헌), 법률 분야의 '사내 통역관'(SK 김준호)이며, 때로는 '수비수나 군대'(한화 채정석)이다."

글로벌 법률 전쟁의 최전선에 서 있는 국내 5대 그룹 법무실 대표들은 기업 법무실을 이렇게 정의했다. 본지 법조팀이 이종왕(58) 삼성그룹 법무실 고문, 김재기(58) 현대·기아차 상임 법률고문, 김상헌(44) LG 법무팀장(부사장), 김준호(50) SK 윤리경영실장(부사장), 채정석(51) 한화그룹 경영기획실 법무담당 부사장을 연쇄 인터뷰했다. 이들은 그동안 좀처럼 언론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이들 5대 그룹은 최근 몇년 사이 사내 법무팀(In-house Counsel)을 대폭 강화했다. '기업이 로펌을 흡수했다', '기업 속의 로펌' 등의 표현이 나올 정도다. 기업들은 왜 사내 변호사를 늘리는 것일까?

◆글로벌 법률전쟁…법무실 수요 급증

삼성 이종왕 고문은 사내 변호사 채용을 '예방 법률'이라고 했다. 한국 기업들은 이제 글로벌 경쟁에 노출돼 있다. 그만큼 국제적인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커졌고, 이를 막는 역할을 하는 변호사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고문은 "1억원 들여 미리 막으면 될 일을 넋 놓고 있다가 나중에 수십억, 수백억 들이는 것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미련한 일"이라고 말했다. 우수한 자질을 가진 변호사들을 영입해 기업을 둘러싼 치열한 환경에 미리 능동적으로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기업이 필요로 한 법률서비스의 본질이 '사후 대응'에서 '사전 예방'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실제 한국 기업들은 최근 수년간 사전 예방에 실패한 쓰디 쓴 경험이 있다. 미국 법무부는 2005년 4월 하이닉스 반도체에 대해 D램 생산을 줄여 가격을 끌어올렸다는 혐의로 벌금 1억8500만 달러를 매겼다.

그해 10월에는 램 메모리 가격을 다른 업체들과 담합했다는 혐의로 삼성전자에 대해 벌금 3억 달러(한화 약 3000억원)를 부과했다. 하이닉스와 삼성전자에 대한 미국 법무부의 조사는 그보다 앞선 4~5년 전부터 진행됐다. 작년 12월에는 LG필립스 LCD에 대해서도 담합 여부에 대한 조사가 시작됐다.

◆기업, 검사 출신 선호

변호사 숫자는 삼성이 많지만, 대기업중 판·검사 출신 중견 법조인을 법무팀 책임자로 처음 영입한 곳은 LG그룹이다. 서울지법 판사 출신 김상헌 부사장은 1996년 LG그룹의 법무팀 책임자로 영입됐다. 법무팀 보강을 먼저 시작한 LG는 이제 윤리 경영이 정착단계라고 말했다. 김상헌 부사장은 "법을 잘 몰라 발생하던 '고의가 없는 위법한 상황'이 법무팀 덕분에 이제는 거의 대부분 사라졌다"고 했다.

뒤이어 최근 2~3년 사이 삼성이 이종왕, 현대차가 김재기, SK가 김준호, 한화가 채정석씨 등을 줄줄이 영입했다. 이들 4명은 모두 중견 검사 출신이다. 이들은 "검사들이 조직 생활에 익숙하고 역동성 면에서도 기업 조직에 적합하기 때문에 영입사례가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김재기 고문은 "정의를 추구하는 검사의 일이나 기업의 윤리·준법 경영을 돕는 법무실의 일이나 크게 보면 똑같다"고 했다.

◆"사내 법무파트 더 활성화돼야"

이들을 영입하면서 각 기업들은 법무파트를 크게 확대했다. 삼성의 경우 3월 하순 기준 변호사 숫자가 171명(국내 변호사 66명, 외국 변호사 105명)에 달한다. 4년 전보다 2배 늘었다. 물론 씨티그룹(1500명), 제너럴일렉트릭(GE·1143명)에 비하면 아직 적은 숫자다. LG그룹도 한국 변호사 15명, 외국 변호사 75명(55명은 해외근무) 등을 비롯, 법무팀 전체 직원이 230명에 이른다.

현대·기아차는 한국 근무 변호사 21명(한국 변호사 8명, 외국 변호사 13명)과 해외 현지 채용 변호사 34명이 활동한다. SK도 한국 변호사 12명과 외국 변호사 13명이, 한화는 한국 변호사 13명과 미국 변호사 2명이 활동 중이다. 변호사 수로 따지면 웬만한 국내 로펌 규모로 커졌다.

그러나 아직도 기업 법무실을 더 키워야 한다고 이들은 입을 모았다. 아직 사내 변호사가 초기 단계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경우가 적고, 그룹 내 타 부서의 인식 전환과 협조가 미흡하다는 것이다.

SK 김준호 부사장과 한화 채정석 부사장은 "기업 법무팀 역할은 앞으로 커질 수밖에 없다"며 "이제는 준법 경영에 대한 최고경영자(CEO)의 확고한 의지가 가장 중요한 기업 현안 중 하나가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