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고문

미국이 어느 나라와 어떤 관계를 맺든 우리가 이래라저래라 할 일은 아니다. 그것은 북한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미·북 관계의 진정한 개선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미·북 관계 개선에는 대단히 중요한 두 가지 고려사항이 있다. 하나는 북한의 핵무기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주민의 인권이다. 미·북 관계의 문제가 한국의 안전보장을 도외시하거나 경우에 따라 한국의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손뼉만 칠 일이 아니다. 미·북 관계의 개선이 김정일 체제를 공고히 해서 북한주민의 경제적 고통과 인권탄압을 연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라면 한국인으로서는 당연히 문제 제기를 해야 마땅하다.

한국의 좌파들은 2·13 합의를 계기로 미·북 접근을 환영하면서 이런 문제 제기나 우려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저해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폄훼하고 있다. 감히 말하건대 미·북의 관계개선이 한국의 안보를 위협하며 북한주민의 고통을 외면하고 가는 것이라면 그런 '평화와 통일'은 의미가 없다.

2·13 합의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스스로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밝힌 기존의 핵무기는 여전히 존재한다. 합의문에는 연변시설 등 핵 프로그램의 단계적 불능화만 언급돼 있지 북한의 핵무기를 포기한다는 문구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북한은 결코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전 세계적 관측이다. 미국과 중국의 전문가들도 "북한은 비핵화의 의지만 밝혔을 뿐 핵을 포기하겠다고 천명한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송민순 외교부 장관은 그나마 "2·13 합의의 실천과정이 취약하다"고 했다.

핵무기의 제거 없이는 한국의 안전이 보장될 수 없다. 많은 한국사람들은 놀랍게도 북핵에 관용적이거나 불감증에 빠져 있다. 우리들 가운데는 북핵을 '강대국을 상대로 살아남으려는 북한의 생존전략'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고, "설마 같은 민족을 상대로 핵을 쓰겠느냐"는 사람도 있다. 노 대통령처럼 북핵을 "사용하지 않는 무기"라며 "북한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하는 협상용"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북핵은 통일되면 우리 것"이라는 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북핵은 그 가공할 살상력·파괴력과 '정치성'에 있어 재래식 무기와는 감히 비교될 수 없는 총체적 무기다. 북핵은 한국을 전부 파괴할 수 있다. 북핵이 있는 한, 한국은 '고양이 앞에 쥐' 격이고 북한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협상용이 아니라 협박용으로 쓸 것이다. 우리는 북핵에 인질 잡혀 끌려다녀야 한다. 독재국가인 북한에서는 독재자 한 사람의 결정으로 핵이 무기화될 수 있다. 제도적, 절차적 제어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북핵을 그대로 놓아두는 어떤 협상도, 그 어느 누구의 합의도 우리는 동의할 수 없다.

2·13 합의나 미·북 관계의 개선에는 북한주민의 인권에 대한 어떤 배려도 찾아볼 수 없다. 북한의 인권탄압을 북한 내부문제라고 한다면 부시 미국 대통령은 애당초 무엇 때문에 '악의 축'이니 인권유린이니 하고 떠들었는가? 탈북 기자를 백악관에 불러 사진 찍고 하는 것은 전부 정치쇼였던 것인가? 결국 미·북 관계 개선은 김정일 체제를 보장하고 그 정권을 유지시켜 주는 것이 될 것이고 북한주민의 노예화와 고통을 연장시켜 주는 것이 될 것이 뻔하다. 지난달 국무부를 떠난 로버트 조지프 전 차관은 NYT와의 인터뷰에서 "2·13 합의는 북한정권의 생명을 연장할 뿐"이라고 했다.

김정일은 핵을 가짐으로써 성공했다. 그들이 그토록 희망해온 미국과의 양자접촉과 관계개선을 얻어내고 있고, 일본과의 경제협력(청구권자금)도 끌어내고 있으며, 미 재무부가 완강히 버틴 BDA의 동결자금을 해제하는 데도 성공했다 북한이 핵 하나로 이렇게 벌어들인 다양한 ‘성과’는 우리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 ‘선례’로 남을 수밖에 없다. 미국은 문제 하나를 푸는 대신 여럿 어려운 과제를 안게 됐다. 20일자 월스트리트저널의 사설은 “지금 김정일은 미소짓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 바람에 고개 숙이고 있어야 하는 것은 북핵에 휘둘리는 한국이고, 탄압에 고통받는 북한주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