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토한 바 없다.’→‘흥미로운 아이디어로 검토해 보겠다.’→‘러시아 전문가들을 파견해 다른 나라들과 함께 연구하겠다.’천연가스판(版) OPEC(석유수출국기구) 설립에 관한 블라디미르 푸틴(Putin) 러시아 대통령의 말이 바뀌고 있다. OPEC과 형태가 비슷한 천연가스 수출국들의 카르텔 설립 움직임이 세계수출량 1위인 러시아에 의해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다.
◆긴장하는 유럽
러시아는 지난달 천연가스 매장량 세계 8위인 알제리, 2위인 이란과 가스 생산·판매 분야에서 보조를 맞추기로 합의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번 주 초엔 천연가스 매장량 3~4위인 카타르·사우디아라비아를 직접 방문, 천연가스 수출국 카르텔 구상 협의에 불을 지폈다. 푸틴은 카타르에서 "러시아는 천연가스카르텔 구상을 거부한 적이 없다"고 했다.
천연가스카르텔이 결성되면 국제 가스가격의 하락을 막기 위해 회원국들이 생산·수출량을 조절할 수 있다. 가스자원 고갈을 명분으로 국유화 조치를 취하게 되면 세계 경제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수도 있다.
특히 천연가스 소비량의 25%, 수입량의 40%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는 유럽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천연가스는 러시아와 유럽 소비량의 10%를 대고 있는 알제리에서 지하 혹은 파이프라인을 통해 유럽에 공급되기 때문에, 가스 카르텔이 형성돼 이 파이프라인 가동을 중지시킬 경우 유럽 전역이 피해를 입게 된다.
◆속뜻은 미국 견제?
하지만 가스카르텔 설립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는 견해가 많다. 압축 설비를 갖춰야 하는 가스 생산에는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매장국들도 소비국이나 메이저회사와 장기계약을 맺은 뒤에야 생산에 나설 수밖에 없다. 가스를 생산해놓고 소비자를 찾는 이른바 스폿(spot)거래는 전체 거래량의 10%에 불과하다. 따라서 가격담합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러시아가 자칫 '손해 보는 장사'를 하게 된다는 분석도 있다. 러시아는 전체 수출량의 25%를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싼값에 공급 받아 유럽으로 되팔고 있고 앞으로는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으로 수입처를 다변화할 예정이다. 이런 마당에 카르텔이 결성돼 중앙아 국가들의 입김이 세지면 러시아가 오히려 궁지에 몰릴 수 있다는 얘기다.
러시아가 이런 위험 부담을 감수하면서 가스카르텔 구상에 적극적인 것은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를 바꿔보려는 의지로 읽힌다. 가스카르텔 예상 참여국 중 이란은 반미국가의 정점에 있고, 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 등은 친미국가다. 이들을 천연가스로 규합할 경우 중동, 나아가 국제질서에서 미국과 유럽의 영향력을 줄이고 러시아의 입김을 강화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