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발견된 의기(義妓) 계월향(桂月香)의 초상화 상단에는 일본 장수‘소서비(小西飛)’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일본 말로는 ‘고니시 히’로 발음된다. 초상화 상단에 쓰여 있는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일본 측의 용장이었던 ‘소서비’는 김경서(金景瑞) 장군과 계월향에 의해 평양성에서 목이 잘려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우리 측 기록에는 소서비가 이때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일본 측 기록엔 소서비가 평양성에서 죽지 않고 1626년까지 살았던 것으로 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흥미로운 불일치이다.

소서비의 원래 이름은 나이토 조안(內藤如安·1550~1626)이다. 15세 때 세례를 받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으므로 이름에다가 천주교 세례명인 ‘조안’(如安)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교토 근방인 단바(丹波) 지역의 호족출신이었고 전투능력을 인정받아 1585년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고니시(小西)라는 성(姓)을 쓰면서 이름을 고니시 히다노카미(小西飛彈守)로 부른다.

그는 임진왜란 중간에 있었던 명(明)·일(日) 휴전회담이 중국 베이징에서 있었을 때, 일본 측 실무대표로 참석한다. 전투능력뿐만 아니라 협상을 끌어갈 만한 지략도 갖춘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때부터 중국과 조선에서 그를 ‘소서비’라고 약칭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0년에 일본에서 벌어졌던 세키가하라 전투(關原戰)에서 서군(西軍)의 주력부대로 싸웠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죽었지만, 소서비는 살아남아 여기 저기 떠돌며 식객노릇을 했다. 1613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천주교 추방령에 따라 소서비는 필리핀 마닐라로 추방됐다. 마닐라에서 일본인 천주교 마을을 세우고 1626년에 병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평양성에서 계월향에 의해 죽은 왜장은 소서비가 아닌 다른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측에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덕무(李德懋,1741~1793)가 저술한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소서비’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1815년에 작성된 계월향 초상화의 상단 기록은 이 책을 참고하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