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의료계가 34년 만에 전면적으로 개편되는 ‘의료법 개정안’을 두고 정면 충돌로 치닫고 있다. 이에따라 전국적으로 진료공백 사태가 발생했던 2000년 의약분업 파동 이후 8년 만에 집단휴진으로 인한 ‘제2의 의료파동’이 재연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환자불편이 우려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회장 장동익)는 3일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에서 임시 대의원 총회를 열고, “정부가 마련한 의료법 개정시안은 의사의 투약(投藥)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등 진료권을 훼손하고 있다”며 개정안의 전면 백지화와 전면 재검토를 정부에 요구했다.
당초 의협은 의료행위 규정에 투약을 명문화해 줄 것 등 10가지 사항에 대해 의료법을 재논의 하자고 요구했었다. 그러나 이날 전국 각 지역에서 온 대의원들이 개정안 자체를 원천적으로 전면 백지화할 것을 결의함으로써 '강경 모드'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정부의 의료법 개정 시도는 국민 건강을 위협하고, 의료인의 권익을 침해하며, 의료계의 질서를 붕괴시키는 심각한 개악"이라고 주장했다. 참석 대의원 186명 중 124명이 강경노선에 찬성표를 던졌고, 이번 주중 전국 16개 시도의사회별로 '의료법 개악 저지 궐기대회'를 잇따라 연 뒤 휴일인 11일에는 전국 회원(9만여명)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궐기대회를 열어 정부를 압박하겠다고 나섰다.
이에 앞서 권이혁 전 보사부장관, 백낙환 인제대 이사장, 허갑범 전 대통령 주치의 등 의협 명예회장단과 고문단을 비롯한 의료계 원로 38명도 성명을 발표, 정부의 의료법 개정안의 전면 무효를 주장했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는 "의사협회는 물론 한의사협회와 간호사회 등 6개 보건의료단체와 시민·사회단체, 전문가들이 모여 5개월간 협상 끝에 마련된 개정안인 만큼 12일까지 의협과의 협상에서 진전이 없으면 그대로 국회에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자존심 상한 의사들
정부가 내놓은 의료법 개정안에는 의사들이 파업 투쟁을 벌일 만큼 민감한 쟁점은 거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따라서 의사들의 반발은 의사들의 고유한 권한을 정부가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데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의사들이 주사를 놓는 행위를 포함하는 ‘투약’ 행위를 의사들의 의료행위에서 제외한 것부터가 문제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또 간호사의 일반적인 진료보조 행위를 뜻하는 ‘간호진단’을 의료법에 넣은 것도 의사의 진료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의사들은 특히 정부가 의료법 개정으로 규제를 완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사들을 정부의 통제아래 두려고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질병 별로 치료 방법 등을 담은 ‘표준 진료지침’은 의료계 자체적으로 만드는 것이 세계적 추세인데도 거꾸로 가고 있다고 의사들은 주장하고 있다. 정부가 ‘표준 진료=정액 진료비’라는 명분으로 정부 통제 아래 의료비를 절감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더욱이 정부가 의료법 개정을 통해 의사와 약사, 의사와 간호사를 이간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투약’은 약사와 입장이 엇갈리고, ‘간호진단’은 간호사와 이해관계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의사들의 전문성을 부정하고, 의사의 권한을 다른 의료직종에 나눠주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현재 보건복지부는 의협회장 등과의 협상을 갖고 쟁점 부분에 대해 이달 12일까지 더 협의하기로 지난달 29일 합의한 바 있다. 그러나 의협 대의원들이 3일 임시총회에서 전면 백지화를 요구하면서 추가 협상이 사실상 무의미해졌다. 정부 입장도 완강해 타협의 가능성도 별로 없다.
특히 정부는 의협측에 내놓을 카드도 딱히 갖고 있지 않다. 복지부관계자는 “이미 다른 의료계 단체와 협상이 다 끝난 상태에서 이제 와서 이를 어떻게 뒤집느냐”고 말했다. 의료법 개정은 이해당사자가 많아 한쪽을 누르면 다른 한쪽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어 손질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