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여름 어느 날, 충남 연기군 행정중심복합도시에 긴 행렬이 이어졌다. 너나없이 물통을 들고 나온 시민들이 용수공급 차로부터 마실 물을 배급받는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미호천은 오랜 가뭄으로 급기야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수십 년 전 '행복도시'로 불렸던 이곳이 이제는 마실 물조차 구하기 힘든 재난 지역으로 변해가고 있다.
전북 김제·정읍 일대는 이와 반대로 폭우가 휩쓸고 지나갔다. 수재민들은 말라리아·콜레라·장티푸스 같은 전염병이 돌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 같다. 이 와중에 라디오에선 '한낮 불볕 더위로 전국 도시에서 노약자가 무더기로 숨졌다'는 방송이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이런 가상(假想)의 기후재앙 시나리오가 실제로 나타날까?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KEI)이 '그럴 수도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4일 펴낸 '기후변화 영향평가 및 적응시스템 구축' 보고서에서다. 이 보고서에는 2025~2100년 사이 한반도에 기상재앙이 닥칠 경우 어느 지역에, 어떤 피해가 나타날지 '우울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미래의 한반도는 가뭄과 홍수 지대
"기후변화로 우리나라 전역에서 한쪽은 가뭄, 다른 쪽은 홍수 피해에 시달리는 이상 기상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는 기상전문가들의 분석이 KEI 연구에서 구체화됐다.
연구 표본지역은 전국 4대강 유역 가운데 금강유역(충청도·전북 일대)이다. 이곳을 27개 지역으로 세분화한 뒤 강수량, 하천 유량, 지형지표 등을 활용해 홍수와 가뭄 피해지를 예측했다. 그 결과, 충청도·전북지역에서는 홍수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전북 김제와 정읍, 군산 등 동진강 일대가 2025년엔 홍수 위험이 가장 큰 지역으로 바뀌었다. KEI는 보고서에서 "온도상승과 강수량 증가로 동진강 일대 홍수위험이 지금보다 세 배 남짓 커질 것"이라며 "이들 지역에 홍수방어시설을 강화하는 등 대책 마련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충남 연기군 미호천과 대전시 갑천 유역은 2025년 이후 가장 극심한 가뭄 피해지로 지목됐다. "(별다른 대책이 세워지지 않으면) 용수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KEI는 전했다. 특히 갑천과 동진강 유역은 평소엔 비가 잘 내리지 않지만 이따금 한꺼번에 폭우가 쏟아져, 가뭄과 홍수 피해가 동시에 커지는 지역으로 꼽혔다.
산림 생태계는 2050년쯤 큰 위기에 봉착할 전망이다. 기온이 치솟고 기후가 변하는 등 서식지 환경이 크게 달라지지만, 전체 산림의 절반을 넘는 55%는 이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도태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KEI는 "(서식지를 이동하는 속도가 빠른 자작나무 같은) 일부 종류를 제외하고는 사멸(死滅) 위험성이 높다"고 말했다. 소나무를 비롯한 침엽수는 2100년이면 지금의 3분의 1만 남게 된다. "강원도 일부의 높은 지대에서나 볼 수 있게 될 것"이란 전망이다.
이상 기후로 2080년이면 벼 수확량도 15% 가량 감소한다. 논 한 마지기(300평 기준)당 수확량이 한 가마(80㎏)가 줄어드는 것으로 분석됐다. 전남지역의 피해가 가장 커 현재 한 마지기에 6.7가마에서 5.4가마로 20% 감소하게 된다. 이보다 상대적으로 추운 강원도와 경북의 감소 폭은 전남의 절반 수준이었다. 이 밖에 이상고온과 뜨거운 공기가 도심에 갇히는 '열섬(heat island)' 현상 등이 상승 작용을 일으켜 기후변화에 취약한 노약자를 중심으로 사망자 수가 큰 폭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KEI는 "2050년이면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지금보다 네 배 가량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기후변화에 따른 노인 인구의 조기 사망이 가장 큰 보건문제로 대두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기후변화 적응 대책 서둘러야
KEI의 이번 보고서는 국내 기후변화 연구가 주로 온실가스를 어느 분야에서, 어떻게 줄일 것이냐 하는 데 주안점을 둔 그간의 연구와 달리 지역별, 부문별로 기후변화의 피해 모습을 그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온도상승 속도를 낮추는 것만큼이나, 이미 발생하고 있는 이상기후에 '적응'하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세계 각국도 이런 적응 대책 마련을 서두르고 있다. '고온경보시스템'이 대표적이다. 2003년 영국·프랑스·스페인 등 서유럽에서 유례없는 폭염으로 모두 2만7000여명이 사망하자 이들 국가들은 서둘러 고온경보시스템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이보다 앞선 2000년 무렵부터 대부분의 주와 시에서 피해예상 지역에 냉방 대피시설을 설치하는 등 규정을 마련했다"(KEI 박정임 책임연구원)고 한다. 미국 질병관리본부가 1979년부터 20년 동안 고온으로 숨진 사람이 8015명이라고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됐다.
지난 2일 발표된 유엔 정부 간 기후변화위원회(IPCC)의 제4차 지구온난화 보고서를 봐도 이런 '적응'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과거 100년(1906~2005년)간 0.74도 올라갔을 뿐인데도 지구는 태풍과 홍수, 가뭄 등 각종 기상이변으로 몸살을 앓았다. 앞으로 세계 모든 나라가 온실가스 배출을 최대한 줄이더라도 지구온도는 과거 100년보다 두 배 이상 높은 1.8도 상승할 것으로 IPCC는 전망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결국 어떻게 적응하느냐가 중요해지는 셈이다.
KEI 한화진 박사는 "정부가 기후변화협약 대응 종합대책을 마련하는 등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아직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완화' 부문에 치중할 뿐"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