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진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유신 치하 긴급조치 판결 판사의 명단을 공개하는 것은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재단하는 전형적인 오류이다. 유신시대의 긴급조치가 정상적인 법치에서의 일탈이며 민주주의의 기본권을 훼손한다는 평가는 이미 역사적으로 내려진 지 오래이다.

따라서 이제 와서 긴급조치의 문제점을 국민들에게 계몽한다는 사회적 의미는 거의 없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새삼스레 반복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당시의 재판관들이 긴급조치에 대해 어떤 개인적 판단을 갖더라도 결국 현행 법 질서에 맞는 판결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엄연한 현실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진실·화해위의 명단공개는 이 법관들에 대한 명백한 징벌이며, 여론몰이를 통해 ‘유신판사’로 낙인 찍자는 것 외에 달리 해석할 수 없다.

진실위가 이 법관들을 ‘징벌’하는 것은 결국 당시 법관들이 긴급조치 재판을 거부했어야 옳았다는 전제 또는 암시를 담고 있다. 그러나 유신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게 이런 현재적 기준을 강요하는 것은 오만이자 몰역사적 시각이다.

법관은 어느 사회에서나 가장 보수적인 위치에 처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들에게 민주투사나 혁명가처럼 행동하라고 요구하는 이들이 만약 당시에 법관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참으로 궁금해진다. 유신시대에 법관이 되고 형사재판을 담당한 이유로 긴급조치 판결을 했던 이들의 다수는 당시의 현실에 대해 복잡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법 질서를 지키려고 했던 법관 전체를 매도하는 행위가 누구에게 도움이 될지 묻고 싶다.

진실·화해위가 갑자기 긴급조치에 매달리는 이유가 이렇다 할 실적이 없는 데 대한 불안감 때문에 자기 존재를 알리는 데 관심이 높아진 것 때문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나아가 야당의 대선후보를 흠집내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는 건 아닌지도 모르겠다. 개인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는 것이 민주주의의 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