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러시아에 갔을 때, 외국인에겐 아주 고가로 팔리는 세계 최고 수준의 연주회, 공연 등의 입장권 일부를 아주 싼 값으로 가난한 자국민에게 공급하는 제도가 있는 걸 듣고 감동한 일이 있다. 정확한 액수는 잊어버렸지만, 요컨대 대중 교통비를 조금 상회하는 정도의 돈만 가지고도 ‘볼쇼이 발레단’ 같은 세계 정상의 문화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시스템이 돼 있다는 것이었다.
역시 또 오래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로 내려오다가 작은 마을의 아담한 도서관에 들른 적이 있었다. 카펫이 깔린 바닥 위의 마춤하게 짠 서가 사이사이에 혹은 의자에 앉은, 혹은 서가에 비스듬히 기댄, 혹은 아예 카펫 위에 길게 엎드린 사람들이 독서삼매에 빠져 있었는데, 놀랍게도 젊은 엄마들이 데려온 돌쟁이조차 안 된 아이들이 여기저기에서 엉금엉금 기어 다니고 있었다.
지금 여기, 내 책상 위에 두 장의 인쇄물이 있다. 한 장은 8만 원짜리 어떤 공연 티켓이고, 다른 한 장은 책 사들일 돈이 없다면서 내 저작물을 좀 무료로 보내줄 수 없느냐는 어느 지방대학 도서관의 호소문이다. 요즘 웬만한 공연의 좋은 자리는 몇만 원이야 기본이고 10만원을 상회하는 것도 많다. 세계적인 연주단체의 연주나 공연은 10만원 단위를 훌쩍 뛰어넘기도 한다. 그보다 좀 싼 공연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대개 싼 게 비지떡이다. 가난한 서민들로선 몇 년이 지나도 연주회장이나 공연장에 갈 엄두조차 낼 수 없다. 그러면서 동시에 다른 한 편에선 저자에게 책을 구걸하는 몰상식한 도서관도 있다. 힘 있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서울의 경우 최소한 동마다 도서관 하나씩은 있어야겠다고 역설해 보지만, 현실이 이 정도면 도서관을 만들자는 말 자체가 아무 의미도 없다.
90년대 이후 문화예술판도 완전히 자본에 잠식당했다고 본다. 돈 놓고 돈 먹기다. 정부 예산이나 기타 문화예술을 위한 공공기금은 비약적으로 늘어났지만, 자본의 논리에 따른 한건주의 지원이거나, 잘못된 평등주의에 밀린 나눠먹기가 대부분이다. 자존심 때문에 나눠먹기에 차마 끼어들 수 없는 참된 창작인들은 문화예술의 공공적인 투자가 아무리 늘어나도 기실 거의 혜택이 없다.
지난주 모처럼 환한 뉴스 하나를 만났다.세종문화회관이 매월 하루씩 천 원짜리 공연을 기획한다는 내용이었다. 공연 내용도 알차게 꾸미겠다고 했다. 좀 더 공연 일수를 늘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첫술에 어찌 배부르기를 바라랴. 이렇게 시작해 차츰 공연 일수도 늘어나고, 나아가 국립극장, 예술의 전당은 물론 상대적으로 좀 더 바닥이 튼튼한 공연 단체의 공연에 이르기까지, ‘천 원짜리의 행복’ ‘3천 원짜리의 행복’ 이런 식으로 세종문화회관의 훌륭한 기획의도가 도미노처럼 번져 갔으면 좋겠다.
“국민적 증오심은 문화가 얕은 나라일수록 심하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다. 우리 사회의 온갖 분열과 경계, 또는 양극화의 문제는 경제적 성장으로 절대 모두 치유할 수 없다. 반사회적인 이런 단층은 무엇보다 양질의 예술문화로 그 틈을 효과적으로 메워 갈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문화예술에 대한 공공적 투자가 잘못돼 오히려 ‘국민적 증오심’을 부추기는 결과가 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가. 갈망이 있어도 돈이 없어 예술판에 갈 수 없는 사람들, 뛰어난 예술재능을 가졌으나 역시 돈 없어 그 재능을 황폐화시키는 사람들까지 마침내 ‘국민적 증오심’을 갖게 된다면, 경제고 정치권력이고 간에, 우리 사회는 사막이 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