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게 상기된 자객들의 얼굴에 동요가 일었다.
곤령합 안의 여인들은 하나같이 남색 치마와 옥색 저고리 초록빛 견막의를 덧입고 있다. 비녀까지 똑같은 걸 꽂고 자객들을 쳐다보고 있는 여인들의 눈엔 공포와 증오가 어른대고 있었다. 자객들이 잠시 멈칫 하는 사이 뒤따라온 왕세자가 어머니의 침전을 막아섰다. 자객들이 왕세자를 밀치고 곤령합 안으로 들어섰다. 왕비의 초상화를 들고 살펴도 그들의 눈엔 다 비슷한 얼굴들이다. 그들로선 왕비를 가려낼 길이 없다.
―누가 왕비냐!
자객의 시퍼런 칼 끝이 앞자리의 상궁의 목에 겨누어졌다.
―대라! 누가 왕비냐!
눈을 감아버리는 상궁의 목을 자객이 깊이 찔렀다. 리진이 털썩 주저앉았다. 기어서 자객들을 뚫고 피를 뿌리고 쓰러진 상궁들 앞으로 나섰다. 이 야만이 꿈인가 현실인가. 한 나라의 중전의 침전을 이리 짓밟고 들어올 수가 있는가. 물러서라, 물러서라, 물러서라. 리진의 가슴속에서 고함이 터졌다. 명하듯 애원하듯 오체투지로 엎드린 리진을 자객이 발로 걷어찼다. 곤령합의 여인들 중 확실히 왕비가 아니라 여겨지는 여인은 짧은 머리에 물빛 드레스를 입고 있는 리진뿐이다. 또 한 명의 상궁의 목에 자객이 칼을 겨누었다.
―너냐!
베어졌다.
―너냐!
베어졌다.
―저 여자에게 물어보면 된다!
얼굴에 소아의 피가 질펀하게 묻은 소촌실의 딸이 한 걸음 늦게 곤령합으로 들어서며 손가락으로 리진을 가리켰다. 자신을 총애한 왕비를 죽음으로 몰아넣어야 하는 소촌실의 딸의 얼굴이 고통과 분열로 인해 왼쪽으로 비틀려 있었다. 왕비와 똑같은 복장을 한 여인들의 공포에 질린 수많은 눈동자들이 일제히 리진을 향했다. 실핏줄이 터진 왕비의 붉은 눈이 리진의 검은 눈 속에서 일렁였다.
―저 중의 누구냐! 네가 지목해라!
자객의 칼날이 리진의 목을 겨누었다. 쓰러져 있던 왕세자가 다시 자객들 앞으로 나서려 하자 뒤따라온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왕세자를 막아섰다. 거칠 것 없이 자객의 칼이 이경직의 배를 칼로 찌르고 휘저었다. 붉은 피를 바닥에 뿌리며 쓰러진 이경직을 밀치고 자객의 칼등이 왕세자의 머리를 내리치려 할 때다.
―안 된다, 이놈들!
두려움으로 서로 부둥켜 안고 앉아 있던 여인들 속에서 한 여인이 몸을 일으키자 그보다 먼저 또 다른 여인이 왕세자를 향해 달려 나왔다. 서 상궁이다. 리진의 목을 겨누고 있던 칼끝이 서 상궁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칼등으로 머리를 얻어맞고 정신을 잃은 왕세자의 관이 바닥에 굴렀다. 이럴 수는…이럴 수는 없다. 왕세자가 위협당하는 것에 자신도 모르게 일어선 여인이 탄식하듯 외치고는 몸을 돌려 옥호루 쪽으로 뛰었다. 소촌실 딸의 손가락이 그 여인을 가리켰다. 서 상궁에게 집중되어 있던 자객들이 왕비다! 소리치며 뒤를 쫓았다. 왕비와 똑같은 복장의 상궁 나인들이 우르르 왕비를 뒤따랐다. 자객들을 가로막으며 내가 왕비라고 외치는 늙은 상궁의 목이 베어졌다. 얻어맞고 발길에 차이고 내던져지며 리진도 정신 없이 무리의 뒤를 따랐다. 무사하소서, 무사하소서…. 리진은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려고 눈을 부릅떴다. 장안당 뜰까지 왕비를 쫓아간 자객들이 기어코 왕비를 붙잡아 넘어뜨렸다. 왕비를 뒤따르던 서 상궁의 등에 칼이 꽂혔다. 리진의 무릎이 푹 꺾이며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 자객 중 하나가 고꾸라진 리진을 거칠게 발로 걷어차며 나갔다. 어떻든 왕비를 향해 나아가려는 리진의 두 팔을 누군가 등 뒤에서 결박 지었다. 멍한 표정으로 키들키들 웃고 있는 소촌실의 딸이다. 찢긴 드레스 자락에 리진의 등이 훤히 드러났다. 결박을 풀어보려고 발버둥 치던 리진의 두 눈이 어느 순간 정지했다. 장안당 뜰에 넘어진 왕비의 속적삼이 헤쳐지고 흰 가슴에 서슴없이 칼이 내리꽂히는 순간 움직임이 멈춰버린 리진의 눈에서 눈물이 붉은 피와 뒤섞여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