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제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여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八域·팔도)의 민생을 보전하려 하니 그대들 대소 신민들은…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순종실록’의 맨 마지막인 융희 4년(1910년) 8월 29일조, 바로 한일병합 당일의 기사에서 순종 황제는 이렇게 말한다. 이 전후맥락 없는 기사는 읽는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한다. 우리의 자의에 의해서 국권이 넘어갔단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영우 한림대 특임교수는 “그것은 일제의 강압에 의해 억지로 만든 조서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유영렬)가 최근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sillok.history.go.kr)를 통해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의 원문과 번역문 서비스를 시작했다. 지난해 '조선왕조실록'의 전문(全文)을 인터넷에 무료 공개〈본지 2006년 1월 28일자 A4·5면 보도〉한 것의 후속 사업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노력은 칭찬받을 만하다. 하지만 이것이 무척 곤혹스런 사료인 것도 사실이다. 오독(誤讀)과 오용의 위험도 있다. 일제시대 총독부의 영향력 아래 있던 이왕직(李王職)의 주관으로 편찬된 것이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 포함되지 않을 뿐더러, 국보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서도 빠져 있다. 내용은 더 심각하다. 일제의 침략과 항일운동에 관한 내용은 대부분 의도적으로 누락시켰기 때문. 두 실록만 읽어보면 대한제국이 스스로 나라를 일본에 넘긴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을미사변을 기록한 1895년 8월 20일조는 “묘시에 왕후가 곤녕합에서 붕서(崩逝)했다”고 적었을 뿐 범인이 누구인지는 철저히 숨기고 있다. 1909년 10월 26일조를 보면 황태자는 황제에게 보낸 전보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사망을 보고하며 “우리나라 사람의 흉악한 손[凶手]에 의해 피살됐으니 놀랍기 그지없다”고 말하고 있다. 한술 더 떠, 내각은 이토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사흘 동안 서울에서 음악과 노래를 금지하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다. 원문 320만 자, 번역문 1120만 자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1차 자료가 그대로 보존돼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참고는 하되 이면의 진실을 염두에 두고 비판적으로 읽어야 할 자료”인 셈이다. ‘대한계년사’ ‘매천야록’ 같은 당시의 다른 기록과 관련 문서들을 함께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종·순종실록 인터넷 공개. /유석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