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9일 제안한 ‘대통령 임기 4년 연임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개헌 논의 일절 불응’이라는 한나라당 입장에 변화가 있지 않는 한 개헌안 처리는 불가능하다. 노 대통령이 이 같은 상황을 모를 리 없다. 노 대통령 스스로 작년 2월에 “되지도 않을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불과 11개월여 만에 입장을 180도 바꿔 ‘개헌 카드’를 던진 이유는 뭘까. 노 대통령의 시선은 개헌안 통과보다는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정국을 흔들려는 게 더 큰 목적이라는 것이다. 또 발표 시점을 이날로 잡은 것은 열린우리당 전당대회(2월14일)와 취임 4주년(2월25일) 등의 정치 일정을 감안할 때, 지금 시기를 놓치면 실기(失機)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이다. 일부에서는 작년 11월 한일(韓日) 정상회담에서 동해 표기를 ‘평화의 바다, 우의의 바다’로 제안했던 것이 알려진 데 따른 역풍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도 발표 시점 선택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①열린우리당 分黨(분당)을 막아라
신당 창당 문제와 노선 갈등이 겹치면서 여당은 사분오열된 상태다. 특히 노 대통령과 여당의 관계는 최악이다. 노 대통령이 신당 창당에 반대하는데도, 여당은 오는 2월 14일 이 문제를 결정하는 전당대회를 갖기로 했다.
강봉균 정책위의장 등 실용파 의원들의 이탈 움직임, 친노파(親盧派) 호남 인맥의 좌장격인 염동연 의원 등의 탈당 선언 등 여당은 이미 분당 국면에 들어가 있다. 당이 4개로 쪼개질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여당의 정치권 새 판짜기 자체를 좌초시킬 수 있는 것이 노 대통령의 개헌 카드다. 여당 내에선 "예정대로 전당대회를 치를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는 말이 나온다. 이날 여당 지도부가 노 대통령의 개헌안에 찬성한 이상, 개헌 정국의 전열을 흐트러뜨릴 수 있는 신당 창당 문제의 우선 순위는 뒤로 밀려날 수 있다는 것이다. 친노파 의원들이 "개헌안 처리를 위해 전당대회 연기"를 요구하고 나설 가능성도 있다.
심지연 경남대 교수는 "사분오열된 여당을 개헌이라는 카드로 묶어두려는 것"이라고 했다. 여당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기 위해 국민적 분열과 혼란을 부추길 수 있는 '극약(劇藥) 처방'을 꺼내 들었다는 얘기다.
②임기 말 레임덕 방지용
노 대통령은 작년부터 심각한 레임덕(lame duck·절뚝거리는 오리라는 뜻으로 임기 말 권력누수 현상을 가리킴)에 시달리고 있다. 노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한 지지도는 10%대 초반으로, 역대 최저치다. 이런 상태에선 정상적인 통치 행위가 어렵다. 노 대통령은 연말·연초 각종 강연에서 "앞으로 계속 시끄러울 것"이란 말로, 이런 레임덕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개헌이라는 정국반전을 위한 '깜짝쇼 카드'를 던진 데는 국정의 중심을 되찾아오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는 관측이다.
김광웅 서울대 교수는 "식물 대통령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막고 대신 정치의 중심에 서려는 계산"이라고 했다.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는 "개헌 깃발 하나를 꽂아서 정국주도권을 잃지 않으면서, 지리멸렬한 여권과 지지층을 결집시키려는 것"이라고 했다.
③실패해도 손해 볼 것 없다
노 대통령은 개헌이 국회에서 부결되어도 '남는 장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를 맞추는 개헌에 찬성하는 국민이 절반 가까이 된다. 지지율 10%대의 대통령으로선 국민 절반 가량이 찬성하는 이슈를 제기해 실패하더라도 최소한 명분은 쥘 수 있다고 계산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 한나라당 때문에 개헌안이 통과되지 못하면 야당에 대한 공세를 강화할 수 있다. 장훈 중앙대 교수는 "개헌 정국에서 한나라당을 수세로 몰아넣으려는 노림수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노 대통령이 개헌 국면에서 TV와 인터넷 등 친여(親與) 성향의 매체를 총동원하는 데 성공하고, 지지층 결집까지 이뤄낸다면 범(汎)여권 재정비의 주도권을 쥘 수도 있다. 그러나 국민 다수가 이런 노 대통령의 정치적 노림수를 읽고 반대 입장으로 돌아선다면 이는 레임덕을 훨씬 더 가속화시키는 쪽으로 작동할 수 있다.